열정과 다정, 그 사이에서

읽는 마음을 옮겨 적는 일, 독립책방에서

by Readraw

립 책방에서

서 모임하며

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서툴면서 진심이었을까. 4월 함께 읽던 책 『붕대 감기』 한 문장에서 어렴풋이 이유를 헤아려 본다.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 윤이형 『붕대 감기』 작가의 말 중 -



흐려진 '내'가 선명해지는 곳 <우리가 쓴 것>

모임이 두어 번 이어졌을 무렵, 휘발되는 대화가 아쉬워 모임장 A가 비공개 밴드 <우리가 쓴 것>을 만들었다.

나는 때때로 일기 같은 드로잉을 게시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알림을 기다렸다.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빨간 숫자가 뜨면, 그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다정하고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었다. 서툰 마음을 꺼내놓고 나면 묘한 쾌감이 일었다. 마음속에 엉켜 있던 이름 모를 감정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누군가의 응원이 절실했었다. 육아와 팬데믹을 지나며 원치 않던 휴식기를 갖게 된 뒤 그림을 그리고 보여주던 ‘나’는 한없이 흐려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통해 아직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곳은 작은 연습장이었다.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드문드문 그곳을 서성인다. 여전히 당시 우리가 가장 무해한 얼굴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우리 기록이 '책'이 되길 바랐다. 밴드 안에서만 숨 쉬던 문장이 사각사각 거친 종이 위에 놓여있는 순간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멤버들도 같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읽는 존재는 결국 쓰는 존재가 되고 싶어 지니까.


'우리가 쓴 것' 밴드







일주년 기념 프로젝트 : 욕망과 부끄러움 사이

전시와 출간을 기획하며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사람은 나였다. 사실 내 안에는 복잡한 마음이 엉켜 있었다. 다시 그림을 그릴 명분이 필요했고, 사회와 연결되고 싶다는 갈증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발견되기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긴 휴식기를 갖기 전, 수채화 그림으로 책을 두 권 출간했었다. 이 경험은 '책이 좋다'로 시작하여 ‘내 사유와 언어로 지어진 집’을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모하였다. 그래서 ‘여성 작가 읽기 모임’ 독립 출판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게 되었다.

여전히 창작자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었었다. 그래서일까. 멤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면, 순수하지 않은 마음 탓에 혼자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소란스러운 자아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결국 '책'이었다. 손에 쥐었을 때 묵직한 무게감, 코끝을 스치는 종이 냄새, 그리고 화면 속 활자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페이지 너머 까슬한 감촉까지. 책을 향한 마음은 단순히 '좋다'는 형용사를 넘어, 손끝으로 만져지는 진심에 가까웠다.

이 ‘좋음’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덜어냄으로 완성된 ‘우리’

책상에 앉아 읽는 여자 모습을 그렸다. 자료를 찾고 선을 긋는 내내 멤버들을 생각했다. 낙서에 가까운 드로잉이었지만 그들은 기쁘게 화답해 주었고, 그 투박한 선은 그대로 우리 모임 로고가 되었다.


한편으론 그림을 그리던 사람으로서 '완성도 있는 그림'에 대한 강박이 고개 들기도 했다. 당시 주로 하던 작업은 고운 흑연 가루를 쌓고 쌓아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그에 반해 드로잉은 5분도 안 걸려 한 장이 뚝딱 그려지는, 공짜로 얻은 요행처럼 느껴졌다. 그전 작업은 오랜 시간 눅진하게 끓여내는 조림 요리였다면, 드로잉은 조리 시간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짧아진 3분 즉석요리 같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밀려왔다. 정성을 쏟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까지 들 무렵, 멤버들은 오히려 그 가벼운 선에서 진심을 읽어주었다.

"아니 이거 진짜 우리 같아요." "이거 딱 좋다!"


그 응원 덕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못내 아쉬워하던 '밀도'는 어쩌면 나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한 두꺼운 화장이었음을. 투박한 선은 숨을 곳이 없지만, 그만큼 솔직했다. 덜어냄으로써 비로소 나는 가면 없는 진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여성작가 읽기 모임' 로고 드로잉
완성된 ’여성작가 읽기 모임-WWBb‘ 로고






전시와 출간 기획 회의

회사 다니던 때를 떠올리며 헐거운 기획안을 만들었다. 이해하기 쉽도록 파워포인트로 레퍼런스 사진과 글을 툭툭 얹은 정도였다. 노트북 화면으로 자료를 보여주며 회의할 때 해맑은 얼굴로 K가 농담처럼 말했다. (1화에 등장한 K)


"나 지금 대기업 임원이 돼서 보고받는 거 같아요. 우리 마인드만큼은 대기업이다!"


그리곤 그녀는 잠시 대기업 임원이라도 된 양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팔짱을 끼며 웃었다. 이 말에 긴장으로 팽팽하던 마음이 바람 빠지듯 피식하고 느슨해졌다. 농담이었지만 웃음과 동시에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회의가 끝나면 나는 단톡방에 회의록을 공유했다. 이 회의록은 더 이상 '업무'가 아니었다. 그건 느슨한 연대를 단단한 실체로 묶어주는 약속이었고, 소속감에 목말랐던 내게는 기분 좋은 책임감이었다.


하지만 이 추진력은 때로 일방적이기도 했다. 단톡방에 '회의록' 파일을 전송하고 나면, 숫자 '1'이 사라지는 속도를 초조하게 지켜보곤 했다. 이 뜨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방해하는 소음이 되진 않을까. '좋아서 하는 일'이 '잘해야 하는 일'로 변질되는 순간, 우리의 다정함에도 금이 갈까 봐 나는 자주 멈칫거렸다.


진지했던 회의 모습


그렇게 수개월간, 아마추어들은 모험을 계속했다. 우리가 회의 끝에 기어이 세상에 내놓기로 한 건 다음과 같았다. 각자 소감을 담은 독립출판물, 그리고 내가 책을 읽고 작업한 그림과 굿즈 전시, 우리가 감응을 얻은 문장 필사 공간 구성이었다.


우리는 우아한 항해를 꿈꿨지만, 현실은 엉성한 문장을 깁고 빈약한 사유를 채워 넣느라 헉헉대는 작은 조각배에 가까웠다. 남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민낯을 원고에 적어 내려갈 때마다 내 등줄기엔 서늘한 자기 검열의 긴장감이 흘렀다. 아마 그녀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하지만 각자 견뎌낸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우리가 단순한 친목을 넘어 '진정한 쓰기'로 나아간다는 증거였다.



*이제는 밴드 안 다정한 응원을 넘어, 화면 밖 냉정한 독자를 마주할 시간이었다. '우리만의 기록'이라는 안온한 핑계에서, 누군가의 책장에 꽂힐 진짜 '책'이 될 때까지 과정을 담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