뱉어내고 벼려내는 시간

쓰고 모으고 고치며 나아간 글쓰기

by Readraw

립 책방에서

서 모임하며

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기록이 책이 되기까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시간은 따로 있었다. 바로 글쓰기다. 우리는 쓰고, 모으고, 고쳤다.

책을 읽고 감탄하는 건 쉬웠지만, 그 감동을 나의 문장으로 옮기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내가 감히 써도 될까?'라는 무구한 겁을 집어먹은 채 노트북 앞에 앉았다.

쓰고 싶단 마음만으로는 건널 수 없었던 순간들. 그 시간을 지나며 우리의 글쓰기는 조금씩 나아갔다.



제비 뽑기가 남긴 건...

‘여성작가 읽기 모임’ 첫 번째 책 프로젝트에 참여한 멤버는 아홉 명이었다.

독서 모임 선정 책은 이주혜 작가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로 시작해 한강 『소년이 온다』, 은유 『해방의 밤』, 그리고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등 총 열두 권의 한국 문학 소설과 에세이였다.


함께 읽었지만, 가닿은 책은 각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중 『금빛 종소리』가 최고의 책이었고, 또 다른 이는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 가장 오래 남았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취향에 따라 선택은 갈렸다.

멤버당 두세 권씩 맡아, 책을 읽고 소회를 진심 담아 써보기로 했다. 나는 그간 그렸던 그림으로도 남겨보고 싶었다. 글이 어려운 사람은 사진으로, 형식은 최대한 자유롭게 하기로 했다. (이후 우린 편지 형식과 이메일 형식, 여행지 안내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작업물이 나왔다.)

단, 책을 소개하거나 독후감 형태에 머물지 말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책을 읽은 '나'의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서 진행된 책 선정 시간. 이건 다시 생각해도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우리 모임 ‘웃픈’ 에피소드 중 하나다.

아무도 맡지 않은 책이 몇 권 남았다. 싫어서라기보다는, 막연히 어려워 보여서 미뤄둔 책들이었다.
이미 각자 책 두 권을 맡은 후였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공평하고 그럴듯한 제비 뽑기를 하기로 했다.
종이를 접고, 펼치고, 하나씩 뽑았다.
작은 종이를 접어 흔들 때 공기마저 팽팽했다.
종이를 펼칠 때마다 비명과 안도의 한숨이 교차했다.

"와! 살았다! 난 아니야!"
"말도 안 돼... 내가 이걸?"

그런데 우리 계산이 뭔가 이상했다. 들어가는 글을 맡은 모임장 '앨콩'과 나가는 글을 쓰는 책방 지기 '버찌'를 빼고 나니... 숫자가 맞지 않았다. 뽑든 안 뽑든 어차피 제비를 안 뽑은 사람도 한 권씩 더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그냥 한 권씩 더 맡아야 하는 거죠?”

누군가의 허망한 질문에 참았던 폭소가 터졌다.

“이럴 거면... 제비는 왜 뽑은 거죠?”
“우리 진짜 덤 앤 더머 아냐?”
“아까 안 뽑았다고 좋아했는데 왜 그런 거지?”

결국 모두가 공평하게 세 권씩 짊어지게 된 무거운 어깨를 서로 바라보며,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서툴고 대책 없지만,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함께 진흙탕에 발을 담그기로 한 그 순간. 어쩌면 이 허술한 제비 뽑기가 우리 팀워크의 진짜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책날개 속 우리가 읽은 목록







판매 혹은 비매, 우리가 감당할 무게

보통의 출판 과정처럼 치밀한 기획이나 타깃 독자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정해진 항로가 없었기에 이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일단 우리는 무엇이든 써보기로 했다.


쓰기에 앞서 매듭 져야 할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왔다.

“이 책, 팔 것인가? 아니면 우리끼리 나눠 가질 것인가?”


단순히 돈을 벌겠다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값을 치르고 사는 글이라는 무게, 기록물로서의 책임, 그리고 독서 에세이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저작권 문제까지. 회의 공간은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우리끼리 보면 됐지, 누군가에게 팔긴 부끄러워요"라며 누군가는 손사래를 쳤고, 또 누군가는 기필코 해내겠다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고민하던 우리에게 독립 출판 경험이 있는 버찌책방 지기 ‘버찌’가 이런 말을 했다.


“책 편집은 고된 노동이에요.
제작비도 상당하고요.
이걸 공짜로 배본하면,
그동안의 시간과 노동의 가치가
사라지는 거예요.”


비매품으로 하면 마음은 편하다. 실수에 너그러워질 수 있고, 저작권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이란 중압감은 결코 경험할 수 없다. 버찌 말처럼 우리 노동에 '가격'을 매기는 일은, 아마추어의 안온함을 벗어나 자신의 글에 온전한 책임을 지겠다는 다짐에 가까웠다. 그렇게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책 값은 9,000원이었다.


뱉어내고 벼려내는 시간

그렇게 각자에게 찾아온 쓰기의 시간.

무구한 겁을 집어 먹은 채로 책상에 앉았다. 정보 전달이 아닌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과정은 예상과 달랐다. 자꾸만 미사여구를 집어넣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혼자 보고 말 일기를 기어코 출판하기로 하다니... 후회가 밀려왔지만 소리 내어 읽어보며 칼을 날카롭게 벼리듯이 문장을 고쳤다.


내가 맡기로 한 책은 『모순』 『금빛 종소리』 그리고 『소년이 온다』였다. (맞다. 제비 뽑기로 운명처럼 당첨된 게 하필 『소년이 온다』였다.) 당시는 노벨상 수상이 확정되기 전이었음에도, 그 책이 가진 역사적 무게가 두려워 피하고 싶었던 책이었다. 글로 담기 어려운 참담한 심정을 점과 선과 면의 시각 언어로 풀어내고 싶었다. 때로는 문장보다 침묵이 더 큰 힘을 갖는다는 걸 믿었기에.


그림에서는 덜어냄의 미학을 배웠지만, 글쓰기는 또 다른 차원의 싸움이었다. 비워낸 자리를 진실한 문장으로 다시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고요가 깃든 새벽이나 혹은 아이가 없는 적요의 낮.

따각 따각 따각

리드미컬한 키보드 소리에 맞춰 감정을 뱉어내듯 썼다. 어쩐지 뱉어내는 건 쉬웠다. 하지만 다시 읽고 순서를 죄다 바꾸는 퇴고의 과정은 머리가 깨질듯했다. 몇 시간을 앉아 쓰고 고친 뒤 다음 날 다시 읽었을 때 수치심이 밀려왔다. 납작한 사고와 빈약한 어휘력을 보곤 가차 없이 Delete키를 눌렀다.


쓴 글을 모두 지우고 백지를 바라보는 허망함이란...

하지만 그 텅 빈 화면에서 다시 시작된 한 줄이 비로소 진짜 내 목소리였다. 읽고 고치고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모호한 감정들이 적확한 언어를 찾아 한 자 한 자 적고 매만진 뒤에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이 왔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말한다. '글쓰기는 저주'라고. 하지만 '글쓰기는 저주이긴 하나 구원하는 저주다.'라고도 했다.


글쓰기는 붙들린 영혼을 구하고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사람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를 구하는데, 이것은 글을 쓰지 않는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고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재현하는 일이며 단지 모호하고 답답하게 남아 있는 감정들을 깊이 느껴보는 일이다.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세상의 발견』 222쪽 -


나 역시 '구원하는 저주'인 글쓰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글을 쓰고 내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립하며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는 이 과정을. 그리고 정리된 원고를 서로에게 내보이기로 했다. 글을 보여준다기보다 내 민낯을 보여주는 일이라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다.


글을 쓰는 일보다 서로의 글을 읽는 자리에서 나는 글쓰기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은 단순히 종이 위에 문장을 놓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나의 조각들을 비로소 하나의 서사로 꿰어내는 일이었으므로.



* 서로의 글을 읽었던 '합평'은 어떤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