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다음의 세계 '편집'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 '인디자인' 독학기

by Readraw

립 책방에서

서 모임하며

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독립 출판으로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글쓰기 다음에는 ‘편집 디자인’이라는 높은 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글쓰기가 영혼을 내뿜는 일이라면, 편집 디자인은 그 영혼을 정해진 사각형 틀 안에 가두는 일이었다.

나 역시 디자인 전공자로서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할 수 있어 호기롭게 인디자인 앞에 섰다. 같은 어도비(Adobe) 프로그램이니 금세 익숙해질 거라 자만했지만, 책을 만드는 세계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혼자서 건너는 법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책의 지도를 그렸다. 본문과 제목의 글자 크기, 여백 설정, 숨통을 틔워줄 행간과 자간, 페이지 번호와 각주 위치까지. 독자로 머물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요소들이 사실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었는지 인디자인을 켜고서야 실감했다.


책의 만듦새란 결국 다정한 배려의 총합이었다. 행간을 1mm 넓히는 일은 그 공간만큼 독자 시선이 편히 머물다 가길 바라는 조용한 환대였다. 참고할 만한 책을 펼쳐 여백의 미학과 서체의 표정을 살피며, 어렴풋이 감을 잡은 뒤 '인디자인'이라는 낯선 세계로 발을 들였다.


편집 작업은 조각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아이가 잠든 틈, 혹은 등교시킨 뒤 고요를 쪼개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설명을 읽어도 알 수 없는 기능들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페이지 하나를 수정하면 도미노처럼 뒷부분 레이아웃이 무너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도서관에서 인디자인 입문서를 빌려오고 유튜브 강의를 톺아보며, 안갯속 같은 프로그램 지형도를 익혀 나갔다.


글을 쓰고 합평하던 시간이 북적이는 '우리'의 시간이었다면, 편집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고립의 시간이었다.

만약 내가 작업을 멈춘다면 멤버들의 귀한 문장이 영영 종이 위로 내려앉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책임감이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불러 세웠다.


계룡산 정기를 받으며 마지막 편집을 한 그날




그리고 함께 건너는 법


책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고요히 사투하고 있었음을. 당시 편집 상태는 서둘러 뒤집어놓은 서랍처럼 무엇 하나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흩어져 있었다. 글과 사진, 그림이 적절히 배치된 에세이였기에, 내지 레이아웃은 단순치 않았다. 초보 편집 디자이너인 나는 길을 계속 헤매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마치 다 알고 있는 듯, 책방지기 ‘버찌’가 원고를 함께 살피자고 제안했다. 경험자의 눈길이 닿자, 갈 길을 잃었던 페이지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본문이 들어갈 때 소제목이랑 간격을 넓혀보면 어때요?"
"가독성을 생각해서 행간은 더 넓어야 해요."
"인디자인에서 아래 '+' 버튼 누르면 글이 자동으로 추가돼요."


원포인트 레슨처럼 쏟아진 조언 덕에, 조각난 파일이 서서히 ‘책’ 형상을 갖추어 갔다. 혼자서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을 것 같던 최종 마무리 단계,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계룡시에 사는 멤버 ㄱ을 찾아갔다. 모임 때마다 흩어진 의견을 모으고 방향을 찾아주는 그녀라면, 든든한 조율자가 되어줄 거라 확신했다.


내가 복잡한 단축키와 씨름하며 레이아웃이 뒤틀릴까 전전긍긍할 때, 그녀는 내 모니터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문장과 문단 사이 막힌 숨구멍을 찾아냈다. 기술적인 벽에 부딪혀 “이쯤에서 타협하자”며 고개를 떨구고 싶을 때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숨은 오타와 오류를 잡아내고 흐트러진 문단 끝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었다.


반복되는 규칙은 흩어진 문장들을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꿰어준다. 소제목과 저자명, 서체와 크기, 문단 부호 등을 하나로 모으는 일. 단순하지만 실수가 잦은 이 반복적 형식은, 교차 검수를 하며 더욱 견고해졌다.

마우스 휠을 굴리는 검지 끝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본문 끝에 걸린 문장 부호 하나, 그림의 끝단이 텍스트와 이루는 0.1mm의 오차를 찾아내기 위해 숨을 죽였다.


모니터의 푸른빛이 눈에 얼얼해질 즈음, 정면 너른 통창 너머보이는 계룡산을 바라봤다. 창밖의 산은 그저 묵묵했다. 그 우직한 실루엣이 마치 우리의 수고를 다 안다는 듯 등을 가만히 다독여주었다. 그 고요한 무게감에 기대어 나는 다시 노트북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카페 책상 위에 노트북 한 대를 두고 우리는 서로 멘털을 맞잡았다. 내가 땀 밴 손으로 마우스를 쥐고 줄 간격을 미세하게 조절하면, 그녀는 “됐다, 이제 예뻐요”라며 단단한 확신을 건넸다.

내가 서툴게 기워놓은 옷을 누군가 곁에서 함께 다듬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워졌던가.






완벽보다는 소중한 완주


김지연 미술 비평가는 저서 『등을 쓰다듬는 사람』에서 함께 바다를 건너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미 있는 일이라도 흥행이 보장되진 않으니, 우리는 대단한 성공을 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다 같이 어딘가에서 아득한 밤들을 건너며, 불가능의 언저리를 가능으로 바꾸고 있다 여기면 못 할 것도 없다. - 김지연 『등을 쓰다듬는 사람』중 -


마침내 최종 파일을 PDF로 변환하던 새벽녘 기묘한 감각을 잊지 못한다. 화면 속을 떠돌던 글자가 인디자인 틀 위에 안착하는 순간, 문장에는 묵직한 중력이 생겨났다. 어떤 문장은 물처럼 흐르며 다정하게 속삭였고 어떤 문장은 단단하게 제 자리에서 선언했다. 문장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이 낯선 감각은, 밤을 지새운 편집자이자 디자이너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초보 디자이너가 작업한 파일은 사실 조각조각 기워 만든 누더기 옷처럼 엉성했다. 텍스트를 한꺼번에 흐르게 하지 못해 끊어 붙인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엉망진창인 기록조차 소중한 이유는 우리 목적이 '완벽'이 아닌 '완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자인이라는 낯선 세계를 통과하며 내가 배운 건 화려한 툴 사용법이 아니었다. 엉망인 채로도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끝까지 건너가는 법, 그리고 내 서툰 손길에 기꺼이 등을 내어준 멤버들의 다정함이었다. 작가로 쓰고, 편집자로 다듬고,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나는 그렇게 '한 권의 책'이라는 바다를 건넜다.



당시 편집하던 파일






완벽함이 아니라 '완주'가 목적이라면


혹시 지금 이 순간, 독립출판을 망설이는 분들이 있다면 나의 엉망진창이었던 첫 경험을 빌려 작은 응원을 전하고 싶다.


우선 현실적인 장벽을 기꺼이 수용해 보자. 인디자인은 유료 프로그램이라 구독료가 발생하지만, 지속적으로 책을 만들 계획이라면 연간 구독이 꽤 합리적인 투자가 된다. 기술적인 두려움 역시 조금은 내려놓아도 좋다. 단행본 한 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 기능은 생각보다 그리 복잡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귀한 것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막막한 순간 곁에서 “잘하고 있다”라고 말해주는 동료의 존재다. 함께라면 이 여정의 완주는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책 한 권을 끝까지 만들어 본 사람은 단순히 기술을 익힌 게 아니라, '다음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은 사람이다. 엉망진창인 채로도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끝까지 건너본 그 경험이, 다음 책의 표지를 그릴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불러 세웠다.



*우리 책 얼굴인 ‘표지’를 그렸던 시간은 어땠을까. 내게 무엇을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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