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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Feb 26. 2023

동은에게 쓴 편지-우리 같이 끝까지 생생히 살아보자.

'더 글로리'를 보고 동은이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동은이들에게. 우리 같이 끝까지 생생히 살아 보자.

- 더 글로리를 보고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동은아,      

네가 제일 바라는 게 뭘까 생각해봤어. 


복수? 아니면 가해자 처벌? 

연진이 혼잣말한 것처럼, “우리(가해자)한테 똑같이 한다 치면 뭘 하고 싶을까?”에 답을 해본 적 있어?     

가해자가 너와 같은 괴로움을 겪으면 어떨까, 감옥에 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격리를 당해 외롭게 늙어가면 어떨까, 별의별 상상하다 지치진 않았을지 말이야. 책에선 생생하게 그리면 이뤄진다는 데 아주 처절하게 복수하다 현타 오는 순간, 둥실 떠오른 내 몸이 현실이라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나는 네가 복수나 처벌보다 간절히 원하는 게 뭘까 고민했어.

그건 내가 겪은 고통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을 것 같아. 폭력을 당한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만인에게 공표하고 싶지 않았을까?     



만약 너의 학교폭력 경험이 공중파 9시 뉴스에 가해자의 얼굴과 가해 동영상과 함께 가해자에게 어떤 처벌이 가해질지 시뮬레이션으로 재생된다면? 지금까지 피해자의 이름으로 지칭되었던 사건이 책임져야 할 가해자의 이름으로 인터넷에 도배된다면? 한 줄 자막에는 ‘가해자는 폭력에 책임을 지고 진정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치료비, 정신적인 피해보상을 하고 앞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분명히 노력해야 한다.’라고 못 박는다면? 영상 댓글에는 모두 100% 가해자 책임이라고 네 편을 들어준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너무 드라마 같다고? 그럼 현실적으로 말이야. 언급한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내 미칠 것 같은 심정을 토로하거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어떠니? 네가 그 피해를 하나하나 말하는 것조차 피로할 수도 있겠다. 내가 대신 생각해봤어. 네 말을 경청한 사람이 너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한다면 뭐가 좋을까?     



네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은 ‘네 잘못이 아니야.’ 그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배우 로빈 윌리엄스)이 단호한 목소리로 윌(배우 맷 데이먼)에게 말한 것처럼. “ 너는 전혀 이상하지 않아. 지극히 정상, 아주 멀쩡해.” 두 눈을 크게 뜬 오은영 박사를 소환해 너에게 계시를 내리듯 말이야.     



왜냐하면 학교폭력을 방관한 선생님은 “너 그 정도면 정신병자야.” 혹은 “너한테도 문제 있는 거 아냐?”라고 하니깐.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방관이 가해에 소극적으로 가담하는 걸 모른 채 2차, 3차 가해를 하니까. “저러니까 따돌림당하지.” “피해당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라는 말이 방관에 대한 핑계라는 걸 애써 외면한 채.      


그렇게 말하는 애들한테 정말 묻고 싶어.

“만약 네가 따돌림당하는 게 너한테 원인이 있다면 그건 뭐 때문이겠니?”

그 이유를 단 하나라도 떠올려봐. 그게 이렇게 폭력을 당할 만큼 큰 잘못이니?     

과연 인간이 다른 생명에게 무해한 존재가 있을까? 너는 얼마나 완전하기에? 너는 얼마나 깨끗하기에? 나한테서 먼지 같은 걸 찾아내 그걸 바로 폭력과 왕따의 원인이라고 하는지 명백한 모순 아닐까. 내가 동은이 너라면, 이게 사람을 얼마나 억울하게 만드는지 알려주고 싶을 거 같아.     


애들이 나한테 자꾸 “너는 좀 달라.” “너는 왜 그래?”라고 묻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말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고치라고 하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되묻고 싶을 거 같아. “그러는 너는 뭐가 그렇게 나와 다른데?”               


지금까진 너의 바람을 알고 싶었다면, 이젠 너의 두려움을 알고 싶어. 가장 힘든 게 뭐였니?

바로 내가 날 싫어하게 된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짐작했어. 학교폭력은 피해자가 외부에 적이 있어 큰 전쟁 치르는 중에 내 내면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를 하게 만들어.      


네가 폭언과 폭력을 당하는 초반에는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웠지.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한동안 믿지 못했을 수도 있어.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나는지.’ 어리둥절했을 거야. 그러다 하나둘 가해자가 더 생기고, 폭력의 정도와 횟수가 늘어나면 가해자의 화살을 자기에게로 겨냥해, 내면에 가해자가 만들어져. 내면에서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가 분리되어, 시시때때로 나를 공격해.      



마치 이중, 삼중 인격으로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내 편도 있지만 다른 한쪽은 가해자의 편을 들어. ‘저 애들이 괜히 그러겠어? 내가 바보 같아 당하겠지.’ ‘선생님이 나한테만 그렇게 하는 건 이유가 있을 거야.’ 하면 그들의 언행에 타당한 이유를 찾게 돼. 가해자와 방관자의 시각과 말들이 내 몸과 정신에 서서히 스며 세뇌당한 거야. 너무 안타깝게도 ‘가스라이팅’이라는 알고 싶지 않은 단어를 체험하게 된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하겠니? 

그들은 힘이 세고 나는 혼자라 외롭고 약하니까. 더군다나 아군이 없다면 더욱 위축되겠지. 강한 그들과 전쟁해서 이길 게 아니라면, 차라리 나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더 안전해.      



그건 전혀 비겁하고 비열한 게 아니야.

나를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뿐이야. 그들이 변하는 것보다 나를 바꾸는 게 쉬우니까.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도 자기에게 있다고 여겨야 그나마 이 잔인한 전쟁에서 생존할 수 있어. 화살이 나에게 향하는 순간, 자책, 비난, 자기혐오로 이어져 뫼비우스 띠처럼 무한반복 돼. 가해자에게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 죽어 보자.’라고 말하지 못하고 나 혼자 종이꽃처럼 시들게 만들어.     



맞아. 

나를 혐오하다 못해 죽이고 싶을 때, 아마 있었을 거야. 그럴 때는 정말 이제 나 때문인가 싶기도 했을 거야. 혼란스러움의 극치를 겪다 보면, 어느 순간 한강 앞에, 옥상 난간 위에 서 있는 너를 발견하기도 했겠지. 발을 5센티미터만 허공으로 내밀어도, 난간에서 상체를 15도만 앞으로 기울여도, 치명적인 약을 몇 알만 더 먹었어도,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어. 네가 그만큼 자신을 아니, 가해자를 죽이고 싶었단 얘기였겠지. 가해를 당함에도 너는 가해자 대신 차라리 자기를 해하려 했던 거야. 그런 너의 선함을 믿으면 좋겠어.     


 

‘피해’와 ‘폭력’은 때린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야. 맞은 사람이 결정하는 거야. 내 상처의 크기와 정도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돼. 나의 요구와 부탁이 정당한지 아닌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돼. 나는 피해받았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세상에서 당당히 찾아가기 바래. 그 방법과 정도도 네가 정할 수 있어. 누군가에게 비밀스레 말하고, 공개적인 자리에 발언하고, 치료받는 일련의 과정이 다른 누군가의 판단으로 훼손될 수 없는 영역이야. 피해 신고하고 싶은지, 가해자가 어떻게 처벌받았으면 좋겠는지도.    


 

동은아,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살아있어 고마워. 네가 살아있기에 내가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는 거잖아. 죽어서는 다 무슨 소용이니? 연진이 같은 나쁜 년도 이렇게 잘만 사는데 네가 왜?



나는 네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오기로 버텨주면 좋겠어. 

어린 시절 방임과 폭력의 피해자가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마지막 대사는 이거였어. “가끔 먹잇감이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 우리는 연진이 같은 사람이 아니잖아? 똑같이 죽이는 건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여줄 거야.     



끝까지 살아남아 나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살면 돼. 

그거면 돼.     


우리 같이 끝까지 생생히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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