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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Dec 23. 2018

9. 아버지의 딸들에게.

아버지와 심리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이 글은 성인 여성에게 해당되는 글입니다.)


  고등학교 학교 야자시간이었어요.

한 친구가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던 소설 ‘아버지’를 읽다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친구가 자기는 울었다며 너는 어떨 것 같냐고 하기에 자신만만하게 “난 안 울어.” 했거든요? 그런데 웬걸. 당황스럽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화장실로 갔죠. 내가 왜 그렇게 당당히 얘기했는지 민망하더군요.


  그 소설을 읽고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연결된 관계와 역할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걸 뺀 나머지 사람이라고 하니 이상했습니다.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는 홍길동이 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버지 딸이었어요.

이우경 교수님이 쓰신 ‘아버지의 딸’이란 책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  '아버지의 딸'이란  분석심리학자들의 용어를 말한다.

아버지에게 각별한 영향을 받은 딸을 특별히 아버지의 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딸들은 형제자매 중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딸이기도 했고,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닮아가는 딸이기도 하다.  >


  아버지는 제가 아들이 아닌 것을 아쉬워하셨지만 만혼에 늦게 태어난 첫 아이를 애지중지하셨죠. 저는 아버지의 인정이 세상의 인정보다 더 중요했고요. 아버지 칭찬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숙제로 느껴졌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경미 감독의 책 ‘잘 돼가, 무엇이든’에서 ‘아빠와 싸우는 일이 힘들어서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늘 편한 길로만 도망 다닌 일이 후회된다. 그렇게 만날 도망 다니면서 나를 몰라준다고 화만 냈다. 아빠한테 나를 증명하는 일은 세상에 나를 증명하는 일보다 늘 어려웠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니, 나 같은 사람이 여기 또 있었다니!



  옛 기억 하나 떠오릅니다.

  제가 대학원생 때 집에 내려가는 기차를 탔는데 아버지께서 우연히 같은 칸에 타신 거예요.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하신 상태로 친구와 함께 서울 어느 장례식장에 올라오셨다가 집에 가시는 길이었고요. 나는 놀라서 “아빠!” 하고 아는 체하고 친구 분께 인사드린 다음 각자 예매한 좌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낌새는 바로 내 옆자리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제 옆의 40대 여자가 갑자기 우는 거예요! ‘이 상황은 뭐지?’ 싶었어요. 그녀는 한참 울다가 어디론가 전화했어요. 친정어머니였어요. 아버지는 잘 계시나, 약주는 요즘 덜하신가 하며 아버지에 대해 몇 가지를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어요.


  ‘이 분은 아버지 딸인가? 아버지와 얽히고 맺힌 게 많으신가?’ 궁금했어요.

그 때 우리 아버지 보고 나도 안 우는데 당신 아버지가 떠올라 울던 그녀, 아버지 사랑이 고프면서, 밀어내는 제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애증으로 점철된 아버지의 딸(그 여성이 실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말이에요.



  애니메이션 영화 ‘Mulan’의 주인공을 떠올리면 쉬워요.

아버지 몸이 약하고 불편해 전장에 나갈 수 없자 하나밖에 없는 딸이 남장을 하고 전쟁터로 향하지요. 주인공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위해 남성성을 키우고 여성성은 잠시 거세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딸들도 아버지를 모델 삼아 열심히 따라했는데 '어라, 우리에겐 그것이 없네?' 싶습니다.


  김영하 소설 ‘오직 두 사람’ 속 주인공 현주와 아버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말마다 같이 영화를 보고,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철학에 대해 토론하고, 제 몸매의 단점을 가장 잘 가려줄 수 있는 패션에 대해 여자 친구처럼 수다를 떨고, 때로는 아예 쇼핑까지 함께 나서던, 젊고 자신만만하던’ 아버지를 현주씨는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현에게 고백하듯 말했던 또 다른 아버지의 딸은 ‘아빠는 제 좋은 모습만 원했던 거예요. 아빠, 아빠, 하고 따라다니는 귀여운 딸’만 원했던 아버지에게 원망감이 듭니다. 주인공 현주씨 아버지는 머린 머독이 분류한 딸과 정서적으로 너무 친밀해서 계속 자신 옆에 묶어두려는 아버지였어요. 유령 애인인 셈입니다. 무슨 애인까지야 싶겠지만, 연인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의식,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욕구에 맞추게 됩니다. 아버지도 아이의 욕구에, 아이도 아버지의 욕구에 조율되어 있어 그 사이에 어머니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돼요.


  예전에 제가 상담했던 한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중학생 딸이 왕따를 당하자 저희 상담센터에 방문했는데요. 유독 기억이 남는 이유는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께서 데리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물어보니 딸 어릴 때부터 학원 수강 신청 때도 어머니 대신 가셨다고 해요. 가계도를 그리면 어머니 자리에 아이가 있는 격입니다. 아버지 옆에서 어머니를 배제하고 더 가깝게 지내는 겁니다. 그녀는 학교에서도 자신을 예뻐하는 선생님들에게 관심 받길 원했지, 또래 관계에서 동등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자신이 친구들보다 정신연령이 높으니 유치해서 함께 놀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도 그녀의 시선과 무시하는 언행으로 인해 따돌리기 시작했던 거예요.



  제가 다른 성인 내담자에게는 아버지 옆에는 어머니가 계시니 안심하라고 말했습니다. 상담 당시 내담자는 그 말이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나중에 병원에서 아버지 수술 후 어머니가 곁에서 병간호하는 모습을 보자 제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찾지 못한 딸은 학교나 사회에 나가서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쯤에서, “그래서 어쩌라고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지금 저에게 “그래, 나 아버지 딸이야. 맞다. 그런데 어떻게 하라고?” 하는 거죠?



  첫 번째는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걸 아는 것이 시작입니다.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아버지 딸’로 살아왔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 지점입니다.



  두 번째, ‘아버지와 나’ 관계에 대한 욕구와 감정을 느끼고 알아차립니다.

연민, 죄책감, 불편함, 스스로에 대한 안쓰러움 등 복잡한 심정을 스스로 공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닙니다. 일정 부분 '자기'를 희생하면서 아버지께 의존하고 있는 건지 살펴보는 거예요. 보는 것만으로도 습관처럼 아버지에게 인정 받는 쪽으로 선택하던 것이 나를 위한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옆에는 든든한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상기하세요. 어머니가 부재하다면, 다른 가족도 충분히 조력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만, 좋고 나쁨이 없어요.

내가 어렸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쓴 것의 결과도 인정합니다.

어떤 영향이었는지 살펴보고 내가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과 아닌 것을 구분합니다.

예를 들면, 내 강점과 약점의 발견, 전공이나 배우자 선택, 남성성과 여성성의 갈등, 어머니(모성)나 여성성에 대한 간과가 있습니다.



  네 번째, 아버지와 작별 의식이나 상실에 대한 애도의식을 합니다.

의식이라고 꼭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고요. 아버지께 독립선언을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와 나는 다른 사람이며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깊이 느끼고 다짐합니다. 앞으로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데 아버지의 의견을 참고할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아버지의 딸들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더라도 심리적 끈을 놓지 못해요. 아버지에 대한 글, 편지를 쓰거나 아버지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상실감을 다룰 수 있습니다. 다양한 그리움과 원망감을 풀어놓다 보면 어느새 극복하게 될 거예요.

  


  다섯 번째, 나는 아버지와 독립된 존재로 분리 작업을 합니다.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욕구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나’를 우선해 선택합니다. 아버지와 적절한 거리,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경계를 둡니다. 이 때 가족 중 이해할만한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도움을 받으세요. 연락하거나 만나는 횟수를 줄이거나, 공간 분리나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방법일 수 있어요.



  여섯 번째, 가능하다면 나와 아버지를 용서하세요.

아버지가 일부러, 의도적으로 나를 ‘아버지의 딸’로 만든 게 아닙니다.

아버지 역시 부모에게 옴짝달싹할 수 없이 가깝게 지내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부분 어머니의 아들로, 아버지의 아들로 희생자 역할이 대물림되었을 거예요.

아니면 아버지께서 일시적으로 심신이 약해져 어린 딸에게 의존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이 한 순간에 되는 건 아니에요.

독립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차근차근 자율성을 키워 한 사람으로 성장하자고요.




아버지의 딸들이여, 우리 독립합시다! ^^




질문 1. 당신은 아버지의 딸입니까? 아버지의 어떤 점을 닮았고 어떤 점은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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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당신에게 아버지와 관련해 말했던 게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예: 저 애는 아빠랑 **가 닮았어. 넌 나의 **한 점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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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2번의 답변을 들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여기에 적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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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4. 당신이 아버지의 딸이라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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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 아버지의 딸인 경우 성역할 정체성, 남성성, 여성성에 대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성역할을 발달,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지 떠올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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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6. 아버지의 딸인 경우 진로와 사회성, 대인관계 면에서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었던 영향을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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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7. 아버지의 딸에서 주체적인 나로 분리 독립하기 위해 어떤 게 필요할지 자유롭게 기록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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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8.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기에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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