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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Mar 10. 2019

9. 소설 설이-심윤경, 한겨레출판(2019)

아이를 기른다는 건 뭘까요, 어떤 게 좋은 양육일까요?


완독

한줄평 : 아이를 기른다는 건 뭘까요, 어떤 게 좋은 양육일까요?


독서모임에서 한 선생님께서 나에게 직접 물어보셨어요.

어떻게 키우는 게 아이를 잘 키우는 건가요?

부모가 먼저 잘 살면 되지 않을까요...? 라는 무책임하고 두루뭉술한 대답을 하고나 서...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 글은 내가 보통 엄마지만, 그래도 아이들, 청소년들 상담하면서 느꼈던 것에 대한 답입니다.

소설 '설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었어요.

아래의 글쓰기는 편의상 반말로 썼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양육 한자 뜻이 궁금해 네이버에 검색해보았다.


기를 양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밥식(食(=飠)☞먹다, 음식)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羊(양)이 합(合)하여 「기르다」, 「양육하다」를 뜻함. 羊(양)은 양의 고기, 중국(中國)에서는 고급 요리, 食(식)은 식사를 하는 일, 養(양)은 먹을 것을 주다→양육하는 일.


기를 육

회의문자

育자는 ‘기르다’나 ‘낳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育자는 子(아들 자)자와 ⺼(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育자의 갑골문을 보면 女(여자 여)자와 子(아들 자)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子자는 거꾸로 그려진 채 주변은 물이 튀어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막 출산을 끝낸 어미와 아이를 표현한 것입니다. 育자는 이렇게 아이를 막 낳은 모습으로 그려졌었지만 소전으로 넘어오면서 어미는 사라지고 子자를 거꾸로 뒤집은 것과 肉(⺼)자가 결합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양육'은 양수를 튀기며 아이를 낳고, 먹인다는 뜻이었다.

출산과 먹을 것을 찾아 가공하여 주는 일을 양육이라 한다.

설이는 새해 첫 날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다.

가정과 부모가 생애 첫 날부터 없었다.

신이 이 아이에게는 모든 것을 0으로 셋팅해 놓아 어떻게 자라는지 살피는 실험을 한 것처럼.

이 아이의 시작은 남들과 다른 마이너스에서부터였다.

왜냐하면 음식물 쓰레기통 안, 과일 바구니 안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이 새해 첫 날 생방송으로 전국민에게 생중계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탄생이 이렇게 떠들썩할 수 있을까?

아마 새해 첫 날 각 병원의 분만실에서 첫 아기라며 기뻐하는 산모와 그 순간을 기사 몇 줄로 담기 위해 기다리는 수습기자들 정도.

그러나 설이는 다르다.

하얀 눈으로 온세상 축복 받은 분위기에 어디 나보다 더 탄생이 주목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 하는 정도다. 그녀가 거기에서 발견됨으로 인해 국민들은 자기가 거기에 두고 온양,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본 것 같은 충격으로 허둥지둥 보육원으로 성금을 보낸다.

그렇게 마음의 빚을 한가득 안고 태어난 설이는 보육원장님의 기대대로 원장실에서 눈치 빠르고 조용하고 똑똑한 아이로 자라난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고 고집하는 원장님 뜻대로 설이는 한 번도 아닌 세 번째로 파양당한다.

파양 이유가 물론 납득할만한 이유여도 당하는 설이에겐 파양 자체가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입양 경험이 설이에게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중반 마지막 파양만이 희미하고 헛구역질나는 체리향으로 기억에 남을 뿐이다.

미국 앤더슨 가족에게 입양간 설이는 그저 가족과 집에 배인 냄새 때문에 알 수 없는 구토만 지속하다 앤더슨 부부가 이러다간 아이가 죽을 것 같아 원래 키우던 이모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 이모는 친이모가 아니며 설이가 태어나던 날 자기는 낳을 수 없는 아이들을 잠깐 보러 온 사람이자, 그참에 거기서 눌러앉게된 보육원 직원이었다. 설이가 보육원으로 돌아오고 미국으로의 입양이 무산되고 원장님이 기관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이모는 입양가정 조건이 되지 않지만 사정해 설이와 동거할 수 있었다.


이모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양육자의 기본 조건에 해당되는 게 없다.

첫째, 이모는 설이를 배 아파 낳지 않았다.

양육자에서 제외된다.

둘째, 원장님이 말한 좋은 가정에 해당되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유복한 가정이 아닌 그저 설이에겐 나이만 이모 뻘인 여성이었다.

설이에게 보내는 눈빛과 말, 행동은 어딘가에 홀린 듯하다.

이모의 말에서 드러난다. 설이에게 보내는 무한 믿음

"우리 설이는 뭐든지 다 잘해요."

이모가 설이를 위해 일부러 못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살림과 교육엔 젬병이다.

설이는 그런 이모를 위해 대신 입학 서류를 작성하고 어른아이처럼 자기 앞가림을 해나간다.

그렇다고 이모가 설이에 대해 속속들이 아느냐? 그것도 아니다.

무관심이나 방임처럼 보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제공이다.

설이는 학교에 다녀오면 다닐 학원이 없다.

혼자만의 시간 동안 무얼할지 스스로 계획한다.

심심하다 보니 영화 한 편을 통해 영어를 터득하고 지루하다 보니 공부를 한다.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난다. 다른 사람의 기대와 시선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 이전에는 그저 재미로, 좋아서 했던 것들을 그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양육의 조건은

* 아이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누군가와 방을 공유한다고 해도 시간은 다를 수 있으며 그 장소가 꼭 집이 아닐 수도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숨을 수 있는 공간은 동네에 많았다.

그리고 무언가 좋지 않을 것만 같은... 나쁜 행동의 시도와 실수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옛날 시골 아이들은 서리, 담뱃불 붙이기, 막걸리 가져가는 심부름하다 중간에 호기심에 못이겨 조금씩 마시고는 쓰러져 있었다는 이야기들.


* 양육자의 모름, 무지

내가 아이를 모른다는 것만 알자.

내가 아이를 그저 어리고 무지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삶을 현명하게 꾸려갈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내 애니까 내가 안다가 아니라, 내 아이라 모른다.

실제 가능성, 잠재력은 전혀 모른다고 볼 수 있다.


* 양육자의 허용하는 테두리와 기다림

이모가 설이에게 보여주는 허용은 아슬아슬하다.


* 아이가 심신이 아플 때와 먼저 요구할 때 기꺼이 신체적으로 안아주고 감정 담아주기

자신의 감정조절, 부모 스스로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딱 그만큼 아이의 감정을 받아줄 수 있다.

따라서 우선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부모의 감정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설이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아픔으로 몸부림칠 때 이모는 자신이 아기를 키워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안다.

그저 아무 '말없이' 고요하지만 힘껏 설이를 꼭 안아준다는 것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며, 네가 감당하는 그 슬픔과 힘듦을 공유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정확히 무언지 모르지만, 함께 느낄 것이고 그러므로 너는 혼자 아니다.

라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광우병 사태 때 소를 키우던 내담자가 본 이야기다.

생때같은 소들을 죽이기 위해 소몰이를 하는데 그 가운데 어미소가 새끼 소가 칭얼대며 어미 젖을 찾자 자기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젖을 먹이더라는 이야기..

어미소도 무섭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담담히 새끼의 배고픔, 안정을 위한 본능적 욕구에 응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 감정에 휘둘려 너를 해치지도, 내가 약해서 뒤로 빼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며, 내가 강해서 함부로 그 감정을 없애지도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겠다는 선언.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보답하고 네 말을 따르라는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너라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싸 안겠다는 행위는

온 마음을 다해 안아주는 것밖에는 없다.


* 자발성과 자유

설이는 어쩔 수 없이 이모가 일하는 시간에는 혼자 감당하고 선택해야 할 것들로 넘쳐났다.


* 집밥과 끼니

예전에 읽은 책에서 본 구절이다. 부모가 밥만 해주고 아이에게 밥 먹었냐 정도만 물어보고 그냥 놔두라고 말이다. 이동식 선생님 사례인데, 아버지가 아이를 가만 놔두지 못하고 일일이 간섭하여 아이가 정신증 초기 증상을 보이자 말씀하셨던 거다.

설이가 먹는 빨간 돼지불고기와 파김치, 냉면과 시현이가 먹는 가사도우미가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정갈한 음식, 시현 엄마가 만든 냉면이 대조되면서, 우리의 식사가 어때야 하는지, 자녀와 어떤 교감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 관계

위의 것들보다 가장 우선하는 것이 관계다.

'관계'란 우리 사이의 투명한 선인데 이것이 두터워질수록 나는 그 사람에게서 안심, 안정, 인정을 받고 싶다.

그러니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꾸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고

우리가 흔히 연애 초반에 느낄 수 있는 설레임과 호기심을 매 순간 갖는다.

그의 마음에 들고 싶고 날 믿어주는 만큼 자기 안의 빛을 발하여 성장시키고 싶은 것

부모가 먼저 매력적인 사람이 되자는 것

아이들이 따라하고 싶을 만큼.

나는 엄마처럼 살거야! 나는 아빠처럼 될거야! 라고 외칠 수 있게.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된다면, 아이들도 나를 모델링하기 때문에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기에.

나는 자신의 상처부터 들여다 보고 내면을 단단하게 하여 부모가 먼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면,

아이도 따라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들은 참 많다.

오드리 햅번, 타샤 튜더, 미셸 오바마, 제인 구달, 등

(많다고 했는데 이 마당에 떠오르는 사람은 왜 네 명의 여성밖에 없는가... 아무튼 부모를 보고 자란 사람들)


반면 시현이의 부모는?

시현이는 외동이다.

원숭이처럼 팔과 다리가 긴 키 크고 멋진 아이돌 같은 아들이다.

그런 아들에게 부모는 의사가 되길 바라며 초등학생에게 갖은 좋은 것들을 제공한다.

시현에게 무언가 기대하고 바란다.

배 아파 낳은 부모라면 자녀가 **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거기엔 건강, 평안과 지성 등 뭐든 좋은 것을 원하지 않으면 부모라고 하기 어렵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특히 상처, 콤플렉스, 자신의 이상과 관련된다.

시현이 아버지는 자신의 상처로 인해 시현이 그 자체로 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존재만으로 빛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늦게 알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설이가 옆에 있으니까.

시헌이 부모에 대해서도 쓸 게 많다.

내가 그렇게 살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고... ㅎㅎ

오늘은 여기까지... 설이에 대한 감상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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