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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케혀 Aug 16. 2019

너 요즘 많이 힘들었구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와중에 '백화점 전자제품과 명품 판매 호조로 매출 상승'이라는 뉴스가 귀에 날아와 박힌다. 


며칠 전 사촌 동생과 점심을 먹고 백화점에 나들이를 갔던 일이 떠올랐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무엇이든 주문을 할 수 있어서 백화점에 갈 일이 도통 없던 나였다. 하지만 사촌 동생의 목적은 뚜렷했다. 원하는 구찌 운동화를 사는 것이었는데 가격을 듣고는 헛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얼마 차이 나지도 않는 최저가를 찾고야 말겠다는 신념 하에 검색어를 달리 해보기도 하고 여러 사이트에 기웃기웃 거리는 나에게 '명품'이라는 단어가 한없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백화점 1층 명품 브랜드 매장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매장 앞에서 대기 중인 게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이게 무슨 광경인가 했다. 이때까지 그다지 들어가 보고 싶지도 않았고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들어갈 일도 없었던 명품 매장 앞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맛집 앞에서 번호표를 들고 대기하듯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가을맞이 세일이라고 하는 걸까?'하고 추측해보았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세일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 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목 부분이 늘어나 축 처져 있고 군데군데 찢어져 구멍이 나있는 반팔 티셔츠가 걸려있더라도 100만 원이 넘는 가격과 브랜드 로고가 투톱이 되어 소비자들을 공략하면 그 아무리 조현우가 막고 있는 지갑 문이라도 열리지 않을까.



매장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어하는 수 없이 다른 층을 먼저 돌아보고 다시 1층에 왔지만 줄은 여전했다. 어렵사리 매장 안에 들어가니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이 검은색 정장을 입고 하얀 장갑을 낀 직원들의 응대를 받아가며 각자의 잇 아이템 앞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명품은 명품이었다. 고객 편의를 위해 음료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투명한 글라스에 얼음과 물을 채워 은색 쟁반에 내어 오는 모습에서 촌스럽지만 나는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다.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늪과 같아서 한 번 그 맛을 알게 되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사촌 동생이 원하는 운동화는 가격 빼고는 흠잡을 곳이 없어 보였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트렌디한 디자인에 편안한 착용감까지 너무 마음에 들었던 나머지 별생각 없이 따라갔던 나에게 신발이 '빨리 카드를 꺼내지 않고 뭐해? 할부로 하면 되잖아'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신발을 신고 회사에 출근하고 친구들을 만나는 몹쓸 상상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나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도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동생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할부로 운동화를 겟했다. 명품을 여러 차례 사보았지만 매번 고민은 되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날 저녁부터 매장에서 신어 보았던 그 운동화 생각이 도깨비풀처럼 엉겨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비싼 가방을 사도 행복은 딸려오지 않는다>


(중략) 한 달 치 월급이 넘는 명품 가방을 질러버렸다. 그렇게 구입한 명품 가방은 역시나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기 전에는 그것만 사면 인생이 바뀔 것 같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면서 그간 내가 했던 비이성적인 행동이 점차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명품 가방을 산 게 아니라 '서울의 멋진 직장 여성의 세계'에 진입하는 입장권을 산 거였다. 하지만 그건 실체가 없는 이미지였을 뿐이므로 가방을 아무리 사더라도 행복은 딸려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외로움, 애정 결핍, 낮은 자존감을 소비라는 가장 쉬운 방법을 통해 채우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거라도 갖추지 않으면 정말로 나는 작아지고 작아져 서울이라는 이 도시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방으로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자그마한 마음을 돌보는 일이 우선이겠다고, 소가죽으로 된 무거운 가방을 들 때마다 난 생각했다. 


요즘도 가끔 우울한 날이면 뭐라도 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일상은 굴욕적이지만 쇼핑의 세계에서는 소비자로서 배려와 존중을 넘치게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럴 때는 그저 그 상태임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카드를 꺼내기 전에 먼저 나를 다독여주는 것이다. '너 요즘 많이 힘들구나'하고.



_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요즘 침대에 누워 명품과 외제차를 검색해보고 유튜브로 리뷰 영상을 본다고 새벽 2, 3시에 잠드는 것이 루틴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힘들게 일어나면서 오늘은 기필코 일찍 자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저녁이 되면 다시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우물처럼 정체되어 썩어가는데 남들은 하나 같이 모든 일이 일사천리인 것 같다. 애써 고개를 빳빳이 들어 보지만 지각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떨군다. '너 요즘 많이 힘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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