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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케혀 Sep 30. 2019

왼손은 거들 뿐

"이해는 완전한 암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지."


어렸을 때 이런 말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무작정 외우지 말고 이해를 해, 이해를" 이해를 하면 기억하기 쉬운데 왜 그것을 굳이 힘들게 외우고 있냐는 말 되겠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보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 배경을 알면 쉽게 그리고 오래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모든 공부에 이해가 뒤 따라 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무식하게 외워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무작정 외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정보는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보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봉착하면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못난 자신을 탓하며 그 자리에 주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책 앞부분에만 공부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유다.




"교수님, 제가 굳이 이곳 독일까지 유학을 온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은 무턱대고 외우게 하는 암기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이해 중심의 선진 교육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국보다 암기를 훨씬 더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아니,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가! 학습은 암기일세. 자네 머릿속에 있어야지 책 속에 있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번쩍이는 아이디어는 책이 아니라 자네 머리에서 나와야 하네. 그러니 열심히 암기하게나."

그리고 덧붙였다. "이해는 완전한 암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지."


(중략)  암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찮고 피곤하며 짜증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암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암기도 잘한다. 왜냐하면 암기에도 창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이라고 한 번 보고 암기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란 그야말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머릿속에 그리는 한 편의 그림일 수도 있다.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이다. 생화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개의 핵산 염기와 20가지의 아미노산, 그리고 수십 개의 탄수화물 구조를 암기해야 한다. 이해할 게 하나도 없다. 무조건 외워야 한다. 이걸 암기하지 못하면 생화학 공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정모 _'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중에서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차고 넘친다. 이해가 안 될 때마다 멈춰 선다면 그 끝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해'는 '암기(외우는 것)'의 반대말이 아니라 암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슛 동작을 배우면서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되뇌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해는 암기를 거들뿐이다. 위 책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필요한 정보라면 우리가 흔히 '노가다'라고 말하는 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암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암기한 정보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어는 순간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고 "아"하고 무릎을 치며 무작정 외웠던 것들이 점에서 선으로 연결되는 신기한 경험도 할 수 있다.






'학습은 암기이며, 암기는 반복이다. 그리고 이해는 암기를 거들뿐이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 매일 무식하게 뇌에 한 줄씩 긋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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