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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케혀 Jun 29. 2020

쓸데없는 관심

'유원'을 읽고

우리는 주변 사람들 또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그것도 아니면 방송인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때로는 지나친 간섭도 하면서 말이다. 지금처럼 초연결된 세상에서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다른 사람 일에 이런저런 말 보태기가 식은 죽 먹기 만큼이나 쉬워졌다. 문제는 의도가 어떻든 그런 관심이 그 대상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는 것에 있다. 



소설 주인공 유원은 화재로 언니를 잃게 된다. 12층 할아버지가 피웠던 담배꽁초가 베란다를 통해 11층 유원이 살던 집에 떨어진 것이다. 유원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함께 낮잠을 자던 언니가 먼저 불을 발견하였지만 불이 점점 더 거세져 피할 수 없게 되자 언니는 이불로 동생 유원을 둘둘 말아 11층 베란다 밖으로 던진다.




그날 이후, 이전에 나를 몰랐던 사람들조차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를 위로하고 축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웃을 때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어하고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행복을 바랐다면서도 막상 멀쩡한 나를 볼 때면 워낙 뜻밖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다행히 지나가는 아저씨가 떨어지는 유원을 받아내서 생명은 무사하였지만 유원은 그날 이후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언니의 기지로 본인은 살았지만 언니는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는 점과 지나가는 아저씨는 유원을 받아내는 충격에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유원에게 눈빛과 말로 그리고 댓글로 마땅히 두 명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유원이 유원 자체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당시 나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었고, 엄마와 아빠는 장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입원 수속을 밟으며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엄마는 즉각 신문사에 내 사진을 내리라고 했지만 이미 내 얼굴을 '11층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한 이불 아기' 혹은 '금정동 참사 유일한 생존자'라는 제목으로 캡처되어 각종 커뮤니티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중략)


- 불쌍해. 애기는 언니 죽은 거 모르나 보다.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네.

- 나중에 죄책감 심하겠다. 

- 아기야. 하늘이 널 도왔나 보다. 건강하게 커서 너도 꼭 다른 사람 돕고 살아라. 







우리가 상대를 위한답시고 해주는 얘기, 안타까워서 아픔에 공감하고자 하는 위로와 위안일지라도 그것이 상대를 더 위축되게 만들기도 한다. 아무렇지 않게나 배설하듯 말하고 쓰는 댓글이 그 대상의 가슴에 못을 박고 다시는 회복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타자의 아픔을 헤아릴 수 없게 태어난 것이 아닐까. 오해가 난무하고 결국에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유원은 실종된 아기를 찾았다는 뉴스를 보며 속으로 얘기한다. 




십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레퍼토리. 나는 살아 줘서 다행이다, 고맙다, 응원한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너무 과한 관심은 삼가자는 식의 댓글을 쓰기도 망설여졌다. 쓸데없는 관심이 아닐까 생각되었으니까.




때로는 쓸데없는 관심보다는 무관심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 속에 가해자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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