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5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아직도 유효한 얘기다. 모두에게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가진자와 빈자의 시간은 결코 같은 유속으로 흐르지 않는다. 문제는 삶에서 그런 인지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속담처럼 빈자의 시간은 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부자에게 넘어간다. 그러한 흐름을 알아채기조차 어려운 시대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빈자는 이로 인해 점점 더 빈자가 되어갈 뿐이다. 자신이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우리는 부자들, 기업 총수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알지 못한다. 주변에는 자신과 비슷한 시간 빈자들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시간 귀한 것을 모른다. 물론 스마트폰 안에서도 중요한 정보, 유용한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얻으려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광고와 기사들을 통과해야 한다. (과연 넘쳐나는 가십과 누르지 않고 못 배기는 베이글녀의 영상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취할 것만 취하고 버릴 것을 버릴 수 있는 단호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전에 잠깐 보려고 들었던 스마트폰을 2시간이 지나도 놓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IT업체, 광고주들은 그러한 우리의 속성을 간파하고 공략해 들어온다. 노예 제도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전히 착취의 대상이 되었고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끓고 있는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개구리처럼.
그러나 현실은 좀 더 엄혹하다. 우리의 시간은 애플과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이 공짜로 빼앗아간다. 게다가 돈도 우리가 낸다. 또한 그들이 만들어 놓은 창을 통해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 서비스가 침투해 또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메시지가 오지 않는 시간에는 게임회사가 나타나 우리의 주의를 독점한다. 부자와 빈자 모두 스마트 폰에 시간을 빼앗기지만 양상은 빈자에게 좀 더 불리하다. 시간은 돈으로 환산하는 감수성이 발달한 부자들은 점점 스마트폰에 들이는 시간을 아까워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가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지킬 것인가.
김영하, <보다>, '시간 도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