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새로운 풍경과 경험을 만나는 설렘으로 시작된다. 나 역시 푸른 바다를 상상하며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 후 바닷가를 거닐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파도소리 덕분에 마음까지 편했다.
하지만 삶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의 연속이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비에 젖었다. 옷은 몸에 달라붙고 신발 속 발은 퉁퉁 붓는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날씨에 여행이 계획이 틀어졌다. 숙소로 돌아와 젖은 옷을 갈아입으며 ‘아, 망했네. 뭐 이러냐.’ 하는 짜증과 실망만 마음속에 가득 찼다. 기분이 바닥을 쳤다.
날씨는 맑아졌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숙소에만 머물기엔 아쉬웠다. ‘어떻게든 남은 시간을 보내야지’ 하는 마음에 차를 몰아 사려니 숲길로 향하는데 소나기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정신없이 움직여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숲길을 따라 운전하던 중, 눈앞에 급커브 길이 나타났고, 순간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빗물에 미끄러진 듯한 차 한 대가 휘청하더니, 그대로 길 옆 도랑으로 굴러떨어지며 전복된 것이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는 옆으로 완전히 뒤집혔고, 세차게 내리는 비는 그 처참한 광경 위로 무심히 쏟아져 내렸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충격과 함께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모르겠다!' 생각이 터져 나왔다. 망설일 수 없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비를 뚫고 사고 현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전복된 차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 둘과 성인 여성 한 분이 갇혀 있었다. 차는 옆으로 누워 있었고, 바로 옆으로는 빗물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으니, 자칫하면 더 큰 위험에 처할 상황이었다. 여성분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살려달라 소리치며 허공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절박한 눈빛과 외침을 보는 순간, 내 안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직 ’구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남았다.
평소 같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상황이다. 오직 안에 갇힌 생명만을 향한 간절함이 나를 움직였다. 전복된 차 위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빗물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오직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여성분의 손을 잡고 힘껏 끌어올렸다. 차가 뒤집혀 좁아진 틈새로 몸을 빼내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필사적인 힘으로 그녀를 차 밖으로 이끌어냈다. 이어 차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도 차례로 구해냈다. 한 명, 한 명 내 손으로 차 밖으로 끌어낼 때마다, 그 작은 생명의 무게가 내 손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순간 느꼈던 것은 안도감 이전에, 오직 이 생명들을 무사히 구해내야 한다는 강렬한 책임감과 집중력뿐이었다. 주변의 빗소리도, 내 몸이 젖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직 내 손에 잡힌 그들의 온기만이 현실로 다가왔다. '살았다!', '됐다!'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세 사람 모두 무사히 차 밖으로 구해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겼을 때,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 차 안에서 비 그칠 때까지 안정을 취하게 해렸다. 119에 전활 걸었지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말에 직접 운전해 제주시에 계신 가족분들께 연락해서 모셔다 드렸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의 엄마에게 검사 결과 큰 이상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입니다.’ 과 ‘안전운전하세요’ 라는 짧은 인사만 남기고 통화를 마쳤다.
사실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짜증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사고와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는 사실은 허탈했던 마음을 순식간에 뒤바꾸어 놓았다. 누군가에게 내 작은 힘을 나누어주어 그들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다니. 망쳤다고 생각했던 비 오는 날이 오히려 내 인생에서 가장 뜻깊고 잊을 수 없는 날이 된 것이다. 이보다 더한 감동이 있을까 싶었다.
기억을 잘하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감동을 잘한다는 말이 있다. 6년 전의 그날 일이 마치 며칠 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때 참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었나 보다.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피어난 생명력, 그리고 그 생명력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가 그곳이 본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에 비로소 아름답게 느껴지고 감동받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에게 제주에서의 그날이 그러했다. 단순히 비 오는 날의 사고가 아니라, 그 비 속에서 내가 존재했고, 내가 행동했으며, 그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제주를 나에게 또 다른 감동이 기억된 특별한 휴가지로 만들었다.
삶이란 어쩌면 이런 감동의 순간들을 하나씩 진주알 꿰듯 모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비바람을 만나 여행을 망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그 시련 속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빛나는 순간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건네고,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벅찬 감정, 혹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눈물 흘리는 순간들, 아니면 그냥 길가에 핀 작은 꽃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까지. 이러한 감동의 기억들이 하나씩 쌓여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제주에서의 그날, 비는 나에게 시련을 주었으나, 동시에 내 안의 용기를 일깨우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 진정한 감동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망쳤다고 생각했던 여행이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기억된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를 발견할 수 있음을 믿는다. 그 진주알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앞으로도 삶이 주는 감동의 순간들을 기꺼이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