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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후 Nov 29. 2021

두루마리 휴지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까?

일상에서 경험하는 디자인 이야기


어느 날 한 동료가 전 직원들에게 단체 메일을 보냈다. 그 안에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까요?

휴지걸이에 두루마리 휴지를 거는 일은 일상에서 매우 자주 있는 일이다. 나는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느낌 가는 대로 걸었다. 휴지를 왜 이렇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일이기에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봤을 법도 한데 그저 매번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기계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질문 자체가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흥미진진했다.

사람들이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논리를 내세워 다양한 의견들을 쏟아냈다. 꽤 설득력 있는 내용부터 웃고 넘어갈 만한 수준의 의견까지 다양했다. 사소하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주제이기도 했고 서로 논리 대결을 펼치면서 대화거리가 확장되었기에 회사 내에서도 며칠 동안이나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물건의 '사용성'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생각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뒤늦게 알게된 사실인데 이 주제에 대해 이미 수많은 사람이 의견을 개진했고 다양한 연구 결과까지 나와 있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100년이 넘은 논쟁거리였다. 물리적 실험을 기반으로 한 공학적인 분석부터, 동양 철학에서 나올 법한 인문학적 분석까지 생각보다 많은 분석 결과가 있었다. 물론 단적으로 어느 쪽이 옳다고 하는 정답은 없었다.


지금부터 양쪽의 주장을 하나씩 살펴보려 한다. 먼저, 잡아당기는 면이 휴지 뒤쪽, 그러니까 사용자 기준으로 벽을 타고 내려오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그룹의 논리를 들어보자.

-휴지걸이에 덮개가 있으면 세게 잡아당겨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 회전 운동 방향으로 제동을 걸어주기 때문이다. (앞으로 걸려있을 때 강하게 잡아당기면 저항이 적어져서 많은 양의 휴지가 풀린다.)
-휴지 면이 뒤로 빠져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안정적이고 물이 튀었을 때 덜 젖는다.

다음은 잡아당기는 면이 휴지 앞으로 와야 한다는 그룹의 논리를 들어보자. 사용자 기준으로는 벽이 아닌 사용자 앞에서 풀리는 방향이다.

-휴지를 앞으로 걸어놓고 돌돌 말게 되면 휴지의 안쪽 면을 쓰게 되어 더 위생적이다.
-물리적인 거리를 계산했을 때 동선이 짧고 효율적이다.
-휴지를 뜯어낼 때 더 유리하다.
-뒤로 걸어놓고 쓰게 되면 휴지가 벽에 쓸리게 되어 화장실 벽의 세균이 옮는다.


양쪽의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다. 절대적인 답이 없어 보인다.


한편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0%가 앞으로 거는 게 맞다고 답했다고 한다. 공인된 기록도 있다. 1890년에는 한 칸씩 끊어서 사용하는 두루마리 휴지의 특허안이 발명되었는데, 특허권자인 카렌스 스코트와 E. 어빈 스코트 형제가 발명한 내용을 보면 사용자 앞쪽으로 거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특허권자의 주장일 뿐이다.

결국 방향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선택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아무렇게나 걸어도 두루마리 휴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휴지는 이물질을 닦을 때 허드레로 쓰는 얇은 종이일 뿐이다.


방향을 반대로 걸었다고 해서 휴지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다. 잘 뜯었다고 해서 5% 더 잘 닦이는 것도 아니고, 앞뒤로 고작 15cm 남짓한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제품의 물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품질에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깨끗하게 닦이는 걸 원한다면 돈을 조금 더 주고 좋은 재질의 휴지를 구매하면 된다.


사실 두루마리 휴지의 방향을 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회사 전체 메일을 통해 날아든 질문 하나가 나의 디자인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좋을까요?"라는 질문은 경험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일상의 모든 경험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스마트폰 앱을 설계하는 것이 경험 디자인의 전부가 아니었다. 두루마리 휴지의 방향을 고민하는 것도 경험 디자인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일상에서도 그 사용성을 다시 고민해 볼 만한 제품들이 많다. 관성에 따라 그냥 사용하던 것이라 별 불편함을 모르고 사용했던 것들이다. 그 모든 것들을 경험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보면 달리 보일 수 있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경험 디자인의 대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 두루마리 휴지 하나에서 시작된 작은 질문이 경험 디자인의 영역을 무한 확장해 주었다.


지금도 두루마리 휴지를 보면 가끔 그때의 추억이 떠오른다. 당시 그 회사에는 탐구심이 가득한 동료들이 가득했다. 다들 경험 디자인에 푹 빠져있었다. 누군가 흥미로운 주제를 들고와서 옆구리를 한 번 찌르면 사방에서 달려들어 토론하곤 했다. 그런 종류의 토론은 고된 업무의 피곤함을 달래주기도 하고 틈새 공부가 되기도 했다. 그때의 에너지가 자양분이 되어 지금의 나로 성장했다.


지금은 그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진성 고객을 대상으로 전략적이고 비즈니스적인 디자인 업무를 주로 하다 보니 말랑말랑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끔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두루마리 휴지는 내게 그때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를 마주하게 되면 여전히 고민한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좋은지 말이다.


참고로 나는 지금 잡아당기는 휴지 면이 앞으로 내려오게 걸어 놓고 있다.



*이 글은 [사용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UX 디자인의 힘]이라는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본문 이미지는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이 블로그의 주인은 위 책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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