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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Apr 24. 2021

해피엔딩(?) 해고 이야기

17: 커리어 체인지 이야기를 이어가며

벌써 1년이 지났다.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고, 실업급여를 받으며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가 갑자기 헝가리에 가게 되었다. 당초 한 달 체류하려던 헝가리에서 7개월을 보내고 2020년 12월 1일 한국으로 다시 귀국했다. 


커리어 체인지' 이야기를 하나의 줄기로 엮고 있는 브런치에서 더 이상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방치해둔지 꼬박 1년이 지나기도 했다. 이제 이직에 성공해서 새로운 스타트업에서 활약하는 나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기 때문에. 그 스타트업에서 성장하는 것이, 나의 커리어가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고 과정에서 들었던 말은 상처가 되었다. 


나쁜 이야기에서 독소가 빠져나가고 그냥 '나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일 년 정도 걸린 듯하다. 어떤 평가와 명목으로 해고를 당했든 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전혀 다른 직무로,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든 일상을 꾸려나갔기 때문에 회복이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시는 스타트업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문득 1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에 썼던 일기와 기록, 해고 과정에 대해 썼던 5장의 사실확인서를 최근 다시 읽어보았다. 



1. 해고를 커리어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처음 이 브런치 시리즈를 쓰려고 했던 건 일하는 사람으로서 저의 궤적을 이해해보려는 욕심이었어요. 글을 써갈수록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나에게 진실된 감각을 찾고 싶다는 생각과 아직 해결되지 않고 생각해보지 않고 상처 받고 실패했던 부분에선 멀어지고 싶었어요.


연대기 순서대로 쓰다 보니 그래서 전 지금 행복하게 일하고 있고, 또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제 삶을 익숙한 줄거리에 맞춰서 정리하려다 보니 진짜 이야기, 진짜 나와 멀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유행하는 스타트업 커리어 담론과 자기 계발 책에서 본 모범적인 행동 양식을 짜깁기한 것처럼 보여줘도 안전한 부분만 쓰려고 한 것 같아요. - 스여일삶 글쓰기 클럽 동료들에게 했던 말, 2020년 5월 12일" 


취직, 면접, 이직, 승진, 연봉협상, KPI 달성, 이력서에 남을 인상적인 프로젝트... 


커리어 이야기는 성공-성공-성공을 연결을 해서 현재를 정당화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번아웃, 힘들었던 회사의 문화, 취준 기간, 삽질하던 기간, 찌질했던 순간, 각종 실패들은 기승전결 구조에서 일시적인 갈등에 불과하고, 결국 그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성장했노라고 포장하고 싶었다. 남 탓, 회사 탓, 사회 구조 탓은 기본이고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 뼈저리게 공감하고 성찰해보지도 않았다. 없는 부분으로 치부하고 좋은 부분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빌라 선샤인 동료인 뉴먼들이 원더우먼(..) 같다 거나, 도대체 안 해본 것이 무엇이냐! 고 했을 땐 우쭐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부끄럽다. 


해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받았던 상처와 충격에 집중했지, 번아웃 기간이나 입사 이후 6개월간 나를 지켜봤을 경영진의 관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위로받고, 공감받고 싶었지 똑같은 방식으로 '심판'을 받으며 비참한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직무(통번역)로 일을 하면서 자신감이 회복되면서부터, 내가 들었던 '비난' 안에는 분명히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를 위한 일, 개인의 성장을 위한 일 사이에 '내 직무와 직급, 연봉에 기대되는 정도의 성과'가 분명히 있고, 이 부분에서 최소한의 효용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시도를 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2. 나는 어떤 사람인가 =/ 나는 어떤 직원인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 꾹 참았다. 최대한 회의실 뒤편의 유리창을 보면서 희미하게 라운지를 지나가는 동료들의 형상을 관찰했다. 그렇게 싫어하는 '말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바로 질문하지도, 변명하지도, 추가적으로 하고 싶은 말도 꾹 참았다. 가만히 있어보았다.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안 됐으니까.


그 회의실을 나간 순간부터, 그리고 2일 뒤에 캐리어를 들고 와서 회사에 가지고 갔던 업무 관련 자료, 책, 책상 위 달력, 볼펜, 인쇄물들, 치약과 칫솔, 머리끈, 생리대, 회사 주변 카페 쿠폰 모음 같은 것들을 쏟아 담고 집에 '조용히' 가기 전까지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나는 모멸감을 느꼈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이유들 하나라도 도무지 진짜 이유라는 납득도 되지 않았다. - 해고 다음 주에 썼던 글"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를 읽으면서 '평판' 부분에서 무릎을 탁 쳤다. 한국 대기업 출신 직장인이 쓴 자기 계발서를 절대 읽지 않는데, 읽었어야 했다. 스타트업 문화를 외쳐도 대기업 직장인들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근무 평가에서 그들이 중요시하는 가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환경에서 내 업무와 역할을 계속해서 정당화해야 한 다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항상 100% 퍼포먼스를 내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입사 초반 버프와 데드라인이 명확한 이벤트로 불태우고 나서, 다운타임 내지 번아웃에 허덕이는 내가 얼마나 못 미더워 보였을까. 


회사를 다니면서 컨디션을 유지하고, 공적인 페르소나를 '일관' 되게 유지해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심리 상담을 들으면서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에 '오버'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던 행동들도 위험신호로 읽혔을 것이다. 


솔직할 수도 없고, 솔직하면 공격받는 환경에서 나는 무슨 일을 해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업무를 잘하는 것 만으로는 이미 낙인찍힌 이미지를 벗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계속해서 시들어가며 병원에 의지하고 다른 방식으로 풀려고 하는 것보다 잘 맞지 않는 문화의 회사는 그냥 그만두는 게 약이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이 건강했더라면, 체력이 있었더라면, 그냥 존버 정신으로 업무에만 미친 듯이 몰두했더라면 괜찮았을까 공상해보기도 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나는 그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족하거나 모자란 천하에 몹쓸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나를 '사용하는 경영인'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물건처럼 대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웠다. 


눈물을 참고, 캐리어를 챙겨 와 조용히 나갈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증거를 수집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했어야 한다는 공상도 했다. 그런데 소용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일하고 싶은 회사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회사가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여기를 나간다고 해서, 심지어 잘렸다고 해서, 내가 일을 못하는 건 아니니까.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그 사람이 나와 일하는 게 '싫다'라고 했을 거야라고 곱씹어봤자,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깊게 생각하는 건 나에게 해롭기만 하다. 


3. '계속'의 힘 


해고를 당하고, (1) 석사논문 연한 기간이 2학기 남았으므로 졸업을 한다. (2) 실업급여를 받으며 쉰다. (3) 당장 이직한다. 세 가지 정도 옵션이 떠올랐다. 전혀 준비 없이 그만두게 되었고, 1달 월급을 더 받아도 당장 내야 하는 월세, 새로 사야 하는 컴퓨터,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컨설팅을 받는데 필요한 비용을 따져보면 빠듯했다. 심지어 월급의 70%를 적금 금액으로 잡아놓았고 당장 한 달 뒤부터 적금에 펑크가 날 예정이었다. 보증금을 빌리기 위해 퇴사 직전 영끌 대출도 받았다. 


실업급여는 감사하지만 지금은 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직이나 퇴사를 굳이 부모님에게 밝히지 않았다가 국민연금 공단에서 날아온 고지서로 알리게 되어 야단법석을 만든 적이 있어, 일찌감치 말씀드렸다. '코로나로 실직' 했다며 당장 생활비 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는 불쌍함 포인트도 피력했다. 여기서 쓰러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를 사고, 아이패드를 사고, 읽고 싶었던 책 30만 원 치를 주문하고, 헬스장을 등록하고, 상담을 하고, 스터디 약속을 잡았다. 직장도 없는데 '일터 밖 동료'를 만들어서 뭐하냐고 의기소침해 있던 빌라 선샤인 활동도 그냥 하기로 했다.(결과적으로 정말 잘한 일이었다) 명상을 계속했다. 옛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글을 많이 썼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만은 나를 하찮고,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 안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떤 일을 해도, 어떤 회사에 다녀도 회사가 나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더 작은 존재니까 무조건 져야 하고, 그들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를 나와도 좋은 동료는 동료로 남는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직장을 구하는 게 아니라, 시들어서 비틀어진 나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 나쁜 습관을 인지하고 좋은 습관으로 나를 재구성하는 것, 경제와 소비 생활에 흐린 눈 하지 않는 것, 회사 사람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아껴주는 주변 관계에 감사하고 유지하는 것, 새로운 동료들을 만들어 주는 것... 


진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질질 끌려다니느라 허덕이던 나를 매정하게 내쳐줬기 때문에 정말 감사하다. 1년 동안 소중한 경험을 했고, 나는 해고를 당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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