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 간의 보이지 않는 신뢰는 아직 건재하다.
주말마다 프라하를 자주 가는 편인데, 혼자서 운전해서 가면 나만의 노래방으로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그러다 지쳐 아무 감정 없이 무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아니면 미리 다운로드하여둔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고 운전을 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도 두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면 좀이 쑤신다. 아직도 한 시간 반은 더 가야 하는데 말이다. 한국같이 이영자 휴게소 맛집 리스트를 따라 찾아가는 재미도 없는 유럽의 고속도로는 시속 130km 가 빠르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심하다. 특히, 브라티슬라바-프라하를 잇는 D2 고속도로는 심지어 몇 년째 공사 중이어서 구간별로 일 차선만 열어두기 때문에 행여 사고가 나면 꼼짝없이 1시간은 더 지체되곤 한다.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서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브라티슬라바-프라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은 운행 횟수, 차로 갈 때 보다 1시간이나 더 오래 걸리는 시간 때문에 운전해서 가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차로 갈 때 걸리는 것이 ‘비용’ 그리고 앞서 말한 ‘지루함'인데, 이걸 동시에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블라블라 카이다.
블라 블라카는 유럽 내 카풀 서비스를 제공하고, 찾아볼 수 플랫폼을 제공하는 사이트이다. 운전자는 본인이 가는 노선과 가격을 올려놓으면, 동승을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청을 받은 운전자는 프로필이나 평점 등을 보고 수락 또는 거절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평점과 자기소개글. 생판 모르는 사람과 카풀을 하는 것이니 서로의 신뢰가 필요한 법이다.
기본적으로 블라 블라카를 이용하는 사람은 조금 더 저렴하게, 빠르게 이동을 하려고 하는 목적도 있지만, 길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보통 즐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정된 시간, 공간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하지 않은 내 생각이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운전자로서 블라 블라카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길 위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프라하-브라티슬라바는 장거리 연애 커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한국으로 치면 부산 - 서울 정도의 느낌?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프라하에서 일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니까. 갓 프라하에서 경영대학을 졸업한 마틴은 프라하에서 인턴십을 하다가 브라티슬라바에 좋은 일자리를 구하게 되어서 프라하에서 브라티슬라바로 돌아온 케이스인데, 여자 친구도 슬로바키아 사람이지만 프라하에서 일한다. 본인은 괜찮은데 여자 친구가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것을 많이 힘들어한다며, 조만간 해결하지 되지 않으면 헤어짐이 있을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현재 여자 친구가 돈벌이도 좋고 회사에서 조금 더 좋은 포지션에 있기 때문에 본인이 현재 일하는 회사에 연봉 협상을 해서 승진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포기를 하고 프라하로 가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이걸 들은 나는 마틴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조금 신선하기도 했다. 무조건 여자가 남자 쪽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포기할 것이 적은 사람 쪽으로 기우는 남녀 간의 관계가. 물론 논리적으로 이해는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장거리 연인 관계에서 장거리 연애를 끝내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연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아서 두 명 모두가 원하는 곳에서 사는 것. 어떻게 보면 제일 윈윈 하는 해결책이지만 그렇게 된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다. 두 번째. 어느 정도 두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절충안으로 장거리 연애를 끝낸다. 이것은 서로 간의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에서만 가능하고, 이것 또한 엄청난 사랑이 필요한 경우다. 절충안도 어떻게 보면 한쪽이 어떤 무언가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주변에서 본 많은 경우는 항상 여자 쪽이 남자의 상황에 맞게 움직인 경우가 많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도 않은 것이, OECD 국가 중 한국이 남녀 간 임금 격차율이 가장 컸다. 내 기억으로는 36퍼센트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가 장거리 연애를 끝내는 절충안을 낼 때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문득 이런 사고의 유연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있구나 싶어 새삼스러웠다.
프라하에서 주말에 살사 수업을 마치고 브라티슬라바로 돌아가는 이바나가 동승하였다. 그녀는 7살 적부터 춤을 배워서 대학교 전공까지 라틴댄서로 마쳤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길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풀타임 일자리였고 파트타임으로 종종 라틴댄스(차차차, 살사, 바차타 및 댄스홀 등)를 가르친다고 했다. 아니, 왜 그렇게 춤을 좋아하는데 전문 댄서가 되지 않았냐고 하니 아무래도 수입이 불안정하고 프리랜서로 일할만큼 본인이 의지가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 옆에 앉아있던 다른 동승자가 본인도 살사를 배우고 싶다며, ‘라 봄바'라는 학원은 어떤 지 그녀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상당히 경계심이 가득한 말투로 ‘뭐 나쁘지 않아'. 단번에 그곳에 좋지 않은 인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근데 그곳은 그렇게 전문적이지 못해, 정확히 춤을 알지도 못하면서도 가르쳐. 대신에 마케팅을 잘해서 인지도가 높을 뿐이야. 사람들이 잘 모르고 거길 가는 거야' 하고 말을 이어갔다. 결론적으로는 전문가가 될 생각은 크게 없는 보통 일반 사람들이 입문하기에는 적절한 곳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어느 정도의 ‘경시 감’ 이 묻어남은 확실했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서 그 분야에서 ‘대히트’를 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한번 더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것과 그걸 어떻게 적절히 내 생업과 이어가는지는 본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아마도 그녀는 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쪽으로 보지 못하는 봉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IT 디벨로퍼로 일을 하던 페테르는 번아웃이 와서 얼마 전 일을 그만두었다. 여기에서는 직장에 고용되어 일할 때 4대 보험 중 하나로 실업 보험료를 낸다. 한국과 다르게, 자의로 그만두어도 실업 급여를 신청할 수 있다. 그래서 페테르는 현재 실업 급여를 받으며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리프레시 중인 것이다. 그러면서 예전부터 흥미가 있었던 저글링을 시작하였다. 가끔씩 길에서 하기도 하고, 무료로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프라하에 어떤 클럽에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근데 어찌 된 게, 보자마자 좀 친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얼마 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있는 큰 대로변에 빨간 신호를 받았을 때 횡단보도에서 누가 저글링 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페테르였던 것이었다. 저건 또 뭐야 하고 참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군 하고 넘겼는데.. 아 참 좁은 동네기도 하여라! 어쨌든, IT 디벨로퍼가 저글링도 한다니 이건 또 처음 보는 직업의 혼합이다. 두 직업 다 나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의 여유가 부러웠다. 힘이 너무 들면 일을 그만두고 본인이 흥미를 가지는 것을 하면서 가지는 회복의 시간이. 한국 사회에는 언제쯤 가능해 질까, 유럽에 살지만 단기 비자로 회사에 묶여있는 나로서는 언제 저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까.
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감을 주는 사람만 동승을 한 것만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너무 조용해서 가는 길이 조금은 어색한 사람도 있었고,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더 늦게 와서 무작정 기다리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계속할 생각이다. 낯선 사람들이 친숙한 사람들로 되어가는 과정, 3시간의 온도차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