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임용 Feb 20. 2020

새소년 [비적응]

소년이 어른이 되어

새소년 - 비적응 (2020)


밴드의 이름 때문인지 새소년의 음악은 성장소설이나 성장영화처럼 감상하게 된다. 그들의 첫 EP [여름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성장음악'이었다. 이번 EP [비적응]을 통해 사실 [여름깃]은 완결된 단일 작품이 아닌, 새소년이라는 큰 성장작품의 한 장면이었음이 드러난다. [비적응]은 [여름깃]의 다음 장면이다. 분위기가 반전됐다. [여름깃]의 마지막 트랙 <새소년>에서 '달려가'라는 구절로 마무리된 이야기는, [비적응]의 첫 트랙 <심야행>에서 '어디쯤 왔을까'로 이어진다.


[여름깃]의 파릇파릇한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외로움이나 사랑 같은 두려움에 처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 성장소설에서 한 번은 겪게 될 수밖에 없는 장치에 불과하다. 애초에 그게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다. [여름깃]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날 해피엔딩이다. 시련을 겪고도 꿋꿋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은 당황스럽게도 [비적응]이다. [비적응]은 두려움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두려움이다. 무엇보다도 갈 곳이 없다는 두려움이다. 첫 트랙 <심야행>부터 네 번째 트랙 <눈>까지 화자는 계속해서 갈 곳이 없다고 말한다. 결국 화자는 <엉>에서 세상 사는 것에 관심을 끄고 그저 웃는다. <덩>에서 아무도 나와 함께 웃어주는 사람이 없는 걸 보고 혼자 춤춘다. <이>에서 완벽한 절망이 된다.


왜 새소년의 이야기는 [여름깃]에서 [비적응]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그전에 먼저 앨범 제목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다.


앨범 소개글은 비적응과 부적응 사이의 차이를 짚는다. 비적응과 부적응은 모두 적응의 반대말이지만, 각각이 대응하는 적응의 뜻은 같지 않다. 부적응은 적응 이후의 개념이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이후를 일컫는다. 비적응은 적응 이전의 개념이다. 적응하기 전에 적극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부적응의 반대인 적응은 수동적인 '동화'이고, 비적응의 반대인 적응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타협'이다. 비적응은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새소년의 이야기는 [여름깃]에서 [비적응]으로 흐른다. [여름깃]을 통해 황소윤이 처음으로 세상에 보여준 모습은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인디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붕가붕가레코드가 중간에서 그녀의 날 것 같은 매력을 사회와 타협시켰다. 소위 말하는 '인디 감성'과 황소윤만의 독특한 매력이 잘 버무려진 음악, 챠밍한 비주얼, 기타를 끝내주게 치는 소녀.


하지만 황소윤은 원래 타협적인 인물이 아니다. 대개 사람들의 첫 적응, 즉 사회와의 첫 타협은 학교에서 이루어진다. 황소윤은 처음부터 타협을 거부했다. 그녀는 대안학교 출신이다. 여기서부터 벌써 그녀는 타협하지 않는다.


[여름깃]의 성공 이후 황소윤의 행보에 타협이란 없었다. 마치 보란 듯이 짧게 머리를 자르고, 피어싱을 하고, 징그러운 그림을 솔로 앨범의 커버로 사용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음악에 담았다.


그래서 구글에 황소윤을 치면 나오는 상위 3개의 연관검색어는 황소윤 페미, 황소윤 담배, 황소윤 대학이다. 타협을 거부한 황소윤에게 세상은 벌써 적대적인 시선을 취하고 있다. 비타협적인 사람을 사회는 고깝게 보기 마련이다.


황소윤이 통과한 이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희망찼던 [여름깃] 다음에 [비적응]이 나타나게 된 게 이해가 되고, 또 슬퍼진다.


마지막 트랙 <이>에서 신나게 '우리 완벽한 절망이네'라고 외치는 황소윤을 보면, 그녀가 심지어 외로움과 적대심에 적응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황소윤은 작년에 So!YooN!이라는 이름을 통해 온전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홀로 풀어냈다. 새소년과 솔로 활동 사이의 확실한 선을 긋고자 했던 것인지 황소윤은 '새소년 모드'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사실 새소년의 모든 곡들도 황소윤이 쓴 것이다. 황소윤은 [비적응]에 굉장히 개인적인 감정을 담았다고도 말했다. 때문에 새소년의 두 EP 역시 황소윤이라는 개인과 연결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황소윤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대부분 매체에서 따온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여기까지의 글이 사실은 매우 조심스럽다. 그럴 일은 정말 없겠지만 만약에 황소윤씨가 이 글을 본다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학교 다닐 때도 작가의 배경을 알고 작품을 봐야 된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조금 오만해보여도 이해바란다.)


그럼에도 새소년은 인터뷰를 통해 [비적응]에서 긍정적인 이야기도 함께 발견해주길 바랬다. 나는 [비적응]이라는 앨범이 정말 슬프게 들리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 긍정적인 메시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적응한, 타협하지 않는 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듣는 다른 비적응자, 특히 자신이 부적응자라고 생각하는 비적응자들은 이 앨범을 들으며 연대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음악이 좋다. 또한 [여름깃]의 존재가 [비적응]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새소년이라는 성장작품은 이제 시작이다. 나는 아직 '시련을 겪고도 꿋꿋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순간'을 기대한다.




심야행


매거진의 이전글 "왜 우리는 팝이 아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