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10년도 더 된 오디오가 있다. 아이들 어릴 적에 CD로 교육교재가 나오는 것을 틀어주려고 산 건데, 사실상 우리 가족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CD는 잘 안 틀어줬고, 그 외에는 딱히 용도가 없었으니까. 계속 처분하고 싶었는데, 이모님이 집안일을 하실 때 그 오디오로 라디오를 들으셔서 처분을 하지 못했었다. 솔직히 짐을 줄이고 싶은 나로서는, 핸드폰도 있고 한데 굳이 꼭 라디오를 들으시는 이모님이 답답할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 라디오를 듣는다.
청소할 때, 빨래 널고 정리할 때, 설거지할 때, 집안일로 손이 바쁜 시간을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워 무언가를 더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놀고 있는 귀에 무언가라도 들려주려니 라디오를 듣게 된다. 딱히 설정하지 않아도 매번 다른 콘텐츠를 자동으로 들려주는 라디오가 이런 일을 할 때에 딱 맞는 매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땐 몰랐던, 이모님 마음을 이렇게 이해한다.
휴직 때 영어공부를 좀 해볼까 하고 야심 차게 영어도서관에서 원어 책을 빌려왔다. 나름 재미는 있으면서 단어나 문법 수준은 낮은 책이라고 열심히 골라는 왔는데, 영어 공부를 놓은 지 오래인지라 문장 하나 수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하나하나 단어까지 찾기는 귀찮은데, 단어가 이해가 안 되니 문장이 이해가 가지 않고, 그러다 보니 한 문단 한 장 넘어가기가 어렵기 그지없다. 이번 주, 꾸물꾸물 꾸역꾸역 겨우 한 챕터 읽어내면서 막내 생각을 많이 했다. 아직 한글도 잘 모르고, 영어는 더더욱 모르는 우리 막내한테 알아서 책 읽으라고 던져준 엄마(=나)가 누구였더라. 얼마나 답답했을꼬. 잘 읽히지도 않고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것 투성이었을 텐데, 미안하다 막내야. 나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을 텐데 까맣게 잊고 무리한 걸 요구했구나. 겪고 나니 이제야 정말로 네 기분을 알 것 같다.
주말에는 사촌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해봤던 '신부'로서, '신부'의 입장에 나도 모르게 빙의하곤 했었는데, 이번 결혼식에서는 '부모'의 시각에서 많이 바라보게 된다. 슬슬 나도 '부모'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 걸까. 부모님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결혼한다고 마냥 신랑과 나만 챙겼던 14년 전 신부였던 나는 참 생각도 마음도 어렸다는 생각이, 이제야 밀려온다.
참 속이 없었다. 이렇게 직접 겪어야만 그 사람 입장을 헤아리는 걸 보면,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건 그저 립서비스였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쯤 속이 깊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