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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Aug 08. 2021

위시리스트 뽀개기

휴직 15주 차

두 가족, 어른 넷, 아이 다섯 총 아홉 명이 함께하는 휴가. 이번 여름휴가는 신랑이 대부분 준비했다. 어디로 갈지도 혼자 고민하고, 숙소도 결정하고, 준비물도 미리 고민해서 사는 등, 분주하게 준비하며 물어보면 나는 대답이나 조금 해주고, 기본적인 준비물만 수동적으로 챙기는 정도 했던 것 같다. 어쩐지 의욕이 없었달까. 어쨌든 그렇게 나는 약간은 시큰둥하게 이번 7박 8일 휴가를 시작했다.

 

삼척에 도착한 첫날, 아이들은 입던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입술이 퍼레지도록 바다에서 신나게 놀았다. 바닷물에서 애들이 잘 놀 수 있으려나 걱정했는데, 늘 아이들은 기대 이상이다. 짠물 빨래를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숙소에서 공용 세탁기를 쓸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바닷가에서 지내는 것에 적응이 될 즈음하니 슬금슬금 하고 싶은 게 생긴다.


'근처에 동굴이 있네. 날이 너무 더우면 동굴에 가자. 여름에 동굴 진짜 시원하다고!'

'시내에 맛집이 있대. 비싼 소고기라 애들까지 배불리 먹이긴 힘들고, 어른들만 먹고 오자. 시장 구경도 하고'

'우리도 폭죽놀이하자! 밤에 보니까 바닷가에서 다들 하던데!'

'오는 길에 보니까 BTS 재킷 촬영지가 있다던데? 여기까지 왔으면 거긴 가야지!'

'10분만 가면 있는 해수욕장이 한국에서 스노클링 하기 제일 좋은 곳 이래. 언제 거긴 꼭 한 번 가자.'

'새벽에 무조건 죽변항에는 한 번 가보자. 경매를 할지, 우리 같은 외지인들이 고기를 살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요 근방에 평소엔 군사시설이고 일 년에 딱 40일만 문 여는 해수욕장이 있대. 지금이 개방기간이래.'


보다 보니 계속 위시리스트가 쏟아져 나온다. 하도 이것저것 하고 싶다고 나불대니, 여행 동지들이 절레절레하면서도 최대한 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짜주었다. 그렇게 넷째 날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죽변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파지 오징어 한 박스 리어카에 싣고 가는 할머니에게 냅다 오징어를 구매할 수 있었다. 오징어는 펼쳐놓고 경매하지도 않고 배 앞에서 끝나버리던데, 운이 좋았다. 이 날 오전에는 청어, 고등어, 오징어, 골뱅이 등 다양한 고기를 잡아온 배들이 계속 들어왔는데, 무려 독도 새우를 잡아온 배도 있었다. TV에서만 보던 그 독도 새우가 살아서 경매되는 광경을 볼 수 있다니. 심지어 신랑은 경매인을 쫓아가서 맛 좀 보게 해달라고 한참 사정하더니 기어코 1kg를 구매해냈다. 와우! 평생 먹어볼 기회가 없을 줄 알았던 독도 새우를 회로 먹는다고? 신랑 최고다! 새우님들이 살아있을 때 얼른 가야 한다며 집으로 곧장 와서는 생으로 먹고, 깐 새우 머리는 라면에 넣어 국물 내고, 남은 머리는 튀겨서 안주로 먹었다. 그렇지. 이러려고 돈 벌고 휴가 오는 거지. 호강했다.


다섯째 날, 동굴을 가기로 했다. 좀 더 미리 알아봤으면 예약하고 가는 대금굴을 갔었을 텐데, 이번엔 환선굴에 가기로 했다. 1.6km가 개방되어 있다는 글씨를 보는 것과, 실제로 동굴 내부를 걸어 다니며 체감하는 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냥 한 바퀴 도는 데만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정말로 거대한 동굴이었고, 정말로 추웠다. 아이들을 얼르고 달래며 겨우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막내 입술이 시퍼렇고 피부가 얼음장 같다. 더운 날, 제대로 동굴 체험을 했다.

저녁엔 아빠들이 애들을 보겠다며 엄마들은 시내 가서 고기 먹고 오라고 한다. 꺄아! 고기도 고기지만 매 끼 해대던 밥에서 벗어나 여자 어른 사람 둘이서 여유 부릴 수 있는 게 더 좋다. 친구랑 맘 편하게 술 한 잔 하며 한 점 한 점 소중히 구워 먹는 고기 먹으니 너무 좋다. 남편들 없으니 할 수 있는 얘기도 나누면서 말이다.


여섯째 날, 해파리에 놀란 아이들이 바다를 거부하고 있어서 계곡에 가기로 했다. 계곡 가는 길에 있는 BTS Buttter 재킷 촬영지에 가고 싶어 마음은 들썩이는데, 나만 팬이고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데다, 나갈 준비하는 와중에 다들 지쳐서 말 꺼내기가 조금 미안하다. 우물쭈물하니 고맙게도 우리 집 식구들이 내가 좋아하는 거 아니까 잠깐 들르자고 해준다. 다른 식구도 허허하면서 같이 가자 해준다. 고마워라. 덕분에 일곱 여자들이 BTS가 누웠던 자리를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누워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게 뭐라고, 뿌듯하다.


마지막 날, 마지막이니 바다에 가서 스노클링을 해야 한다고 장호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얕은 바다가 있어서 아이들이 잘 논다. 내 목표는 스노클링 해보는 것, 구명조끼 입고 스노클 끼고 사람이 적은 바깥쪽으로 슬금슬금 나가본다. 아열대 바다처럼 화려한 색의 물고기들은 없지만, 나름대로 예쁜 바다다. 해초도 많고 물고기도 여러 종이 보인다. 팔뚝만큼 큰 숭어도 있고, 납작한 광어 새끼도 보인다. 물고기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펜스 바깥이다. 바다에 빠져들어 볼 땐 편안하다가도, 이렇게 동떨어졌다고 느낄 때, 한없이 깊어 보이는 바다를 볼 때는 훅 무서워진다. 다시 진정하고 바닷가로 향한다. 추워서 물에 못 들어갈때까지 스노클링 원 없이 했다.


사실 더운 여름 아이들 다섯 챙기며 삼시세끼 해 먹이느라 사실 좀 힘든 일정이었다. 셋째 날 즈음부터 나는 손가락이 부어서 주먹이 쥐어지지 않기 시작했다. 피곤하면 나타나는 염증인데, 한동안 괜찮다가 무리한 일정에 도져버렸다. 다급히 약 털어 넣어 가며 버텼고, 나뿐 아니라 여행 동지들이 다 같이 나눠 서로 도와가며 배려해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내가 하고 싶던 것들을 할 수 있었던 게 너무 좋았다. 본인의 의지 없이 그냥 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간절히 원해서 하면 가슴속에 깊이 남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휴가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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