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군 Sep 27. 2016

카스테라

박민규

냉장고의 보급은 인류의 삶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가장 획기적인 성과중 한가지는 식중독, 암 등 질병의 발생률을 대폭 낮춘 것이다.
신선한 야채를 항상 먹을 수 있다는 점과 소금에 절이지 않은 생선의 섭취,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식품을 먹음으로써 현대의 인류가
건강한 생활을 누리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다. 냉장고를 통해, 비로소 인류는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그렇다. 20세기는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였다.

(중략)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카스테라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승일아. 온몸으로 밀어, 온몸으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상습적으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다. 인류의 나이는 300만년이고, 나는스무살이다. 누가 뭐래도 세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한다면 자본주의의 나이는 고작 400년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래도 그쪽이 편했다.
말과 눈치가 통하고, 우선 먹고 마시고, 입는게 비슷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구와 인류보다는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늙어간다.
당신이라면, 아마도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몰라몰라, 개복치라니



삶의 향방은 크게 달라졌다. 입사(入社)를 하고, 칠년간 맞벌이를 해서, 신도시에 지금의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은근히,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직급이 변하길 바라는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가을날인가, 깊이 담배 한 모금을 들이켜다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마흔이었다. 동지가 간 데를 알아도, 깃발은 나부끼지 않았다. 신도시에 온 아내는, 급격히 살이 찌기 시작했다.

(중략)

그리고 <십칠 년 전의 나> 같은 것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나는 얼른 총구의 각도를 5도 정도 왼쪽으로 틀어버렸다.
순간 나와 상관없는 일, 보복, 죽으면 나만 손해 등의 플래시 셔터가 연속으로 머리 속에서 터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허공을 가르는 탄환의 소리를 나는 들어야 했다.
휘유~
안도의 한숨을 닮은 그 소리가, 그래서 정확히 내 고막에 명중되었다. 우웅우웅. 순간 원반들이 선회하기 시작했다.
비록 총성이 들린 후의 반응이었지만, 총성 따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마치 뒷걸음을 치듯 원반들이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안 돼, 다시 내가 소릴 질렀다.
원반들이 물러선 그곳은 바로 옥수수밭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옥수수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무력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달리면서 알 수 있었다.

                                                       -코리언 스텐더즈



구~응. 세번째 곡이 끝나가는 스피커에서 다시금 그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계는, 옥상은, 한 척의 배는 행진을 멈추고
어느새 굳건한 사물로 정박해 있었다. 이런, '녹음' 이 끝나가는구나, 종종걸음으로 돌아서는 <일 년 전의 담임>에게
우리는 '녹음' 처럼 잘 가시란 인사를 되풀이했다. 선생이 떠나고 나자, 우리는 2만 리 해저에서 개별적으로 걷고 있는 느낌이 들 만큼
마음이 착잡하고 외로워졌다. 15미터로 세상을 사는 일은, 150미터로 세상을 사는 것과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어 보였다.
아는 것을 힘이라 생각하는 동물은 이 넓은 지구에서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실은 그래서 왜소하다.

                                                            -대왕오징어의 기습



어느새 신경안정제는 나의 주식(主食)이 되었다. 인간이 별게 아니란 생각이 그때 들었다. 맞으면-아프고, 뉘우치고,
숙이고, 무섭고, 궁리하고, 포기하고, 빌붙고, 헤매고, 재빨라지고, 갈라지고, 참담하고, 슬프고, 후련하고, 그립고,
분하고, 못 잊고, 죽고 싶고,
쓰라리지만 이를테면 
몇 알의 약, 그 미약한 화학물질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나는 아무렇지 않았고, 건강했고, 건장했다. 정말이지 이 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 되어 있었다.

                                                                           -헤드락



그 한달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시기였다. 계절이 봄이란 이유로 히터를 전혀 가동하지 않았으므로,
실제 방 안의 체감온도는 몹시도 추운 편이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그 좁고, 외롭고, 정숙하고, 정숙해야만 하는 방 안에서 - 나는 웅크리고, 견디고, 참고, 침묵했고,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어쩌면 인간은 -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게
아닐까.

(중략)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갑을고시원 체류기








이상문학전집이 아니었다면,
못만났을 재기넘치는 그의 글들.

이제사 '첫' 소설집을 보게 되었는데 어찌나 유익하던지
점차 그의 글들에게 하염없이 빠져들어 가는 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왠지 헤괴하다.
외모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 표지엔 '책의' 제목과는 전혀 상관없는 왠 동물들과 괴수들이 포진 해 있고
그걸 작가 본인이 그렸다.

그리고 무언가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마지못해 현실로 끌려들어가는,
하지만 그 속에서도 어린아이의 순수함 만은 '잊지' 않으려는 각 소설속의 '남자' 주인공들의
내면세계는, 각기 다른 소스들인데도 불구하고
일치하여,
마흔에 가까워 지는 작가의 동화적 심성을 투영하고 있는것 같아
꽤 씁쓸하지만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나's 런던놀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