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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Oct 02. 2016

버티는 삶에 관하여

허지웅

대체 얼마만에 써 보는 책 리뷰인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부터 시작하면 근 반 년 동안 이 책을 읽은 느낌인데(그만큼 책 읽는데 게을렀다는 이야기),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봄의 시작과 함께 나는 이사를 했고 유난히도 더웠던 짧고 굵은 이번 여름을 보냈으며 네이버 블로그를 어느정도 활성화 시켜 놓았다.

돌이켜보니 블로그는 사진과 짧은 글(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로만 연명해 온 느낌이 드는데


아닌게 아니라 확실히(그간 '북카페' 에 올라온 책들을 보시라. 로타가 대부분이다 - 이게 다 로타 때문이야-)

쉽고 빨리 어딘가에 올릴 수 있고 하는 작업(?) 을 선호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책과는 멀어지는게 체감이 됐달까.

(개인적인 시간이 가장 많은 주말엔 그저 멍- 하니 지냈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읽지 않고 쟁여둔 책들이 너무 많아서(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족히 10권은 넘음) 하루빨리 저것들을 다 읽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다는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조용한 곳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읽는게 또 묘미 아니겠나- 라는 생각에

차근차근 한 권 씩 읽다 보면 다 읽어내지 않겠나.



아무튼 이 책은 여러 핑계로 완독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에세이집 답게 굉장히 잘 읽히는 책 되겠다.


딱히 허지웅을 지지한다거나 옹호하는 마음은 없고

그저 '마녀사냥' 이라는 케이블 채널의 프로그램에서 연애에 해박한 척, 젠체하면서 말을 잘 하길래

'너 얼마나 잘 쓰나 읽어나 보자' 라며 구입한 마음도 있고

한편으로는 제목에 확실히 끌렸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허지웅의 엄청나게(!) 굴곡진 인생사를 시작으로 자신의 정치관과 본인이 재미있게 본 영화 평론에 이르기 까지,

한 문장으로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있는 책이다.


그래서 본인의 과거사를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숙연(!!) 해 지고 처연해 지기까지 하지만

'난 이도저도 아닌 중립적 입장인데, 야당이든 여당이는 그네들이 하는 짓거리들은 정말 꼴같잖다' 라는 정치색을 드러내는 대목에선 좀 얄밉고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고

영화평론을 할 때는 확실히 '영화 평론가로 글을 쓰던 인간' 이라는 허지웅의 아이덴티티가 느껴져서 타고난 영화감상쟁이, 평론쟁이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회적 이슈들, 약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할 때엔 '허지웅을 국회로!' 라고 쓰여져 있는 피켓을 들고 나가 jtbc앞에서 시위라고 벌여야하는게 아닐까 할 정도로 가슴뭉클하게 잘 쓴다.



솔직한 말로 '평론가' 라는 이름으로 밥값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확실히 재미도 없는 영화들 위주로 예술이랍시고 평가를 높게 책정하는 사람도 있고

순수한 오락영화를 두고 스토리 부재 개연성 부재 운운하며 평가절하 하는 사람도 있는 요즘이다.


내가 누누이 이야기를 하지만,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평론가의 말, 먼저 보고 온 관객들의 말 따위 듣지 말고 보지 말고 그냥 극장에 가서 보길 권한다.


하지만 허지웅이 좋다고 하는 영화들(이 책에 소개한 영화들) 은 

굳이 하나하나 찾아서 다운로드 받고 보게 만들 정도로 영화 평론을 잘 한다(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스윙보트, 록키 1편, 더 레슬러, 데미지, 더 헌트를 이미 다운 받아놓았다).

(이미 본 영화라면 다시 보고 싶게끔!)


앞으로 허지웅의 이런 에세이집은 또 구매해서 읽게 될 것 같다.

세상을 보는 좀 삐딱한 그의 시선과 문체가 tv에 나오는 이미지와 오버랩 되면서 굉장한 설득력을 가진다.

역시 사람은 tv에 얼굴 좀 디밀고 볼 일이다.










+

책 읽기를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는 경우엔 나처럼,

에세이가 제격이다.

권 수가 몇 권이나 되는 '최장편 소설' 따위를 읽다가 독서를 몇 달 멈췄을 경우, 그 시리즈의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불상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세이부터 다시 시작하길 권한다.

그것도 아주 잘 읽히는 책으로.

(이 글을 쓰는 지금 이미 이 책을 넘어, 두 번째 책을 텀 없이 곧바로 읽고 있다)




















구청장이라는 외삼촌의 직업 때문이었을까. 우리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으리으리한 아파트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엄마가 창피해서였을까. 이 시간에 돈 받으러 와서 외삼촌에게 얻어맞고 있는 엄마가, 창피해서였을까.










우리는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이 영화나 연속극이라도 되는 양 타인과 자신의 삶을 극화 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계기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거나, 최소한 보상받으리라 상상한다. 내 상처가 이만큼 크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오해받고 있고 너희들이 내게 하는 지적은 모두 그르다, 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결국 응답받지 못한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한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요컨데 지금 시대가 보여주고 있는 불관용의 모습은 스스로의 됨됨이에 관해 지나치게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완전무결하지 못한 타인을 과하게 탓하고 자신의 악행은 선량한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기는 이중성이 팽배해 있다. 스스로 정말 그렇게 믿거나 혹은 그런 사람으로 보이게끔 가장하고 있는 것일 테다.

실제 타인에게 더 많이 사랑받을 수 있는 나로 화장하기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래봤자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시체가 될 뿐이다.










나는 전에도 글을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다. 글쓰기로 여태 먹고살아왔다. 나는 나의 이 별것 아닌 재주가 고맙고 사랑스럽다. 이제 와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그냥 방송 건달일 뿐이다. 쓸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몸이 가장 많이 상했다. 그래도 컴퓨터 앞에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앉아 있는 습관은 버리지 않았다. 엉덩이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여타 대개의 한국산 선후배 문화에는 장점만큼이나 나를 질식하게 만드는 냄새와 결이 있다. 선배와 후배라는 이름으로 날줄과 씨줄을 자처하지 않고서는 좀체 안도할 수 없는 병이 보인다. 나는 좀 빼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에는 깍두기라는 훌륭한 전통이 있다.










가족은 가족에게 폭력적이다.










나는 포경수술에 대해 할말이 참 많은 사람이다. 중학교 때 했는데 다년간의 자위행위와 포르노 교육을 통해 알 만한 건 거의 다 섭렵하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포경수술은 사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인생의 과정이자 통과의례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포경수술-대학입학-군복무-취업-대출-자가용 구입-결혼-대출-내 집 장만-아버지 되기-부채 탕감-바람 피우기-외로운 죽음. 이라는 저 삶의 위대한 관성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다 할 만한 출발점이랄까.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책만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하루 십오 분이라도 시간을 쪼개어 읽어야 한다. 재미있는 건 하루를 아무리 바삐 보내보았자 결국 그 시간만이 온전히 남는 장사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는 거다. 

tv만 보면 테이스트가 없는 사람이 되고, 인터넷만 보면 자기가 해보지 않은 모든 것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틀렸다고 말하게 되면, 경험만 많이 쌓으면 주변 세계와 격리된 꼰대가 됩니다. 종류가 무엇이든 책을 읽으세요. 가장 오랫동안 검증된 지혜입니다.










광주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 익숙하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기억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가십기사는 인기 있다. 사람들은 연예계 가십기사를 좋아한다. 당장 연예계 가십 정보를 몰라 궁금해 죽어버릴 것 같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대화를 기술로, 처세를 자산으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하나둘 알아두면 일상에서 승룡권이나 파동권처럼 써먹을 수 있다.










한국의 스필버그, 한국의 미야자키 하야오, 이제는 한국의 닌텐도를 찾는다. 만약, 스필버그와 미야자키 하야오와 닌텐도가 한국에서 시작했다면 그 모든 성공 신화가 가능했을까. 이 같은 욕망이 한국 문화산업을 망쳐놓고 있다.










오늘 누군가 대보름 소원을 물었다. 나는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보게 해달라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좋은 영화를 본다는 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스승과, 연인과,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는 볼 때보다 보고 나서가 더 중요하다. 사유가 필요하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저 현실의 근심을 잊기 위해 찾아보는 프랜차이즈 오락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건 온당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신보다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할 것 같다.










<다이하드> 시리즈는 가정을 복구하려 전전긍긍하는 가부장 마초의 눈물겨운 분투기와 같다. 이건 서른다섯 살 먹은 남자가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가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이야기다.










<500일의 썸머>는, 흡사 감기가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이제 막 연애를 끝낸 모든 이들이 봐야 하는 영화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혹시 모를 성장의 기회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청해야 하는 것은 성공담이 아니라 굴복하고 실패한 이들의 이야기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넌덜머리가 나고 억울해서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마다

그 문장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발음해 보며 끝까지 버팁시다.

저는 끝까지 버티며 계속해서 지겹도록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화두는 무엇입니까.


모두들, 부디 끝까지 버티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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