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끝까지 걷는 힘
조선의 다빈치, 다산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와 조각, 해부학과 기계공학, 건축과 수학까지 넘나든 전방위의 천재였습니다.
조선에도 이에 견줄 만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
그는 정치·법률·경제·과학·문학·철학 등 전 영역에 걸쳐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만 다빈치가 인류 지식의 지평을 예술과 과학으로 넓혔다면, 다산은 그 지식과 기술을 ‘백성을 위한 제도와 삶의 개선’에 집중시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다빈치”이자, 동시에 “백성을 위한 제도 설계자”라 불릴만 합니다.
성리학 비판과 실학의 집대성
조선 후기 성리학은 본래의 도덕 철학에서 멀어져, 관념과 말놀음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백성의 삶을 외면한 채 형식화된 과거 시험 준비와 학파 간 논쟁이 지배했고, 실제 민생의 문제는 뒷전이었습니다.
다산은 이를 “허망한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 비판하며, 현실을 바꾸는 실용적 학문, 곧 실학(實學)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그는 《경세유표》를 통해 중앙 정치와 행정 제도를, 《목민심서》를 통해 지방 행정을, 《흠흠신서》를 통해 사법·형벌 제도를 새롭게 설계했습니다.
토지 제도 개혁안인 여전제·정전제를 제시하고, 거중기와 같은 과학기술을 고안하여 수원 화성 축성에 기여했습니다.
이 모든 저술과 설계의 중심에는 백성을 이롭게 한다(利用厚生)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실패와 포기에 대한 다산의 가르침
정조는 총명하고 뛰어난 다산을 깊이 신뢰하고 아끼며 개혁의 동반자로 여겼습니다. 다산은 이러한 정조의 총애 속에서 젊은 나이에 핵심적인 관직에 올라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정조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노론 벽파 세력은 정적이었던 남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정조의 죽음에 가슴 치며 통곡했던 다산은 졸지에 천주교 신자라는 모함을 받아 형제들과 생이별하고,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는 절망과 함께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무수한 좌절과 마주했습니다.
정치의 길은 닫히고, 스승이던 임금은 세상을 떠났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었던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성공의 길이 있으나, 실패의 길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정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초의 기계와 실험, 첫 모델이 완벽하게 작동한 적은 없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오류 속에서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설계했고, 다른 이는 실패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쌓인 개선들이 오늘의 진보를 만들었습니다.
또 그는 말했습니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기운을 꺾어서는 안 된다(事之不成 不可以氣餒).”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은 그의 정치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학문의 절정기였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만 700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습니다.
정치·행정, 법률, 경제, 과학기술, 의학, 문학까지 전방위에 걸친 그 기록은, 유배를 ‘학문의 황금기’로 바꿔놓았습니다.
다산은 제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물이 막으면 배를 띄우면 된다.
막힌 데서 멈추는 것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패는 그저 한 과정일 뿐입니다.
다산이 강진에서 버텨낸 18년과 수백 권의 저술처럼, 우리가 걷는 길 위의 실패는 결국 성공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실패는 포기하는 순간 확정된다. 끝까지 걷는 한, 그것은 여전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