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커밍 제인>
※ 영화 비커밍제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시골, 아름다운 소설가가 있다. 그 당시 사회는 나이가 되면 누군가와 결혼을 해야 하고, 그래야 가족들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시대이다. 결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제인’은 결혼에는 영 관심이 없다.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지만 아직 사랑에 대해서는 크게 느낀 바가 없다.
그런 그녀의 앞에 재수없는 도시 남자가 나타난다. 변호사 ‘톰 리프로이’는 사사건건 제인의 생각과 부딪힌다. 그녀가 사랑을 모르고, 우월감에 차있다며 제인의 주변을 맴돌며 심기를 건드린다.
그러나 오직 그만이 그녀의 소설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다. 제인의 낭독에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톰은 제인이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끊임없이 제인이 생각했던 세계를 부순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제인과 달리 소설 속엔 현실에는 없는 낭만과 격정적인 감정이 있으며, 사회에 정의는 없다고 말한다. 그 감정들에 대해 알게 된 제인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부잣집 아들 위슬리에게는 없는 자유롭고 당찬 매력들이 그에게는 있었으니까.
가족들은 사랑이나 행복 따위 보다는 현실적인 돈을 보고 결혼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위슬리의 가족들은 소설을 쓰는 가난한 제인에게 청혼한 것을 고맙게 여기라고 말한다. 사랑과 현실에서 갈등하던 제인은 무도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다.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 사람만 보이는 마법. 그의 존재에 미소가 나오고, 그의 눈빛에 감정을 숨길 수가 없어진다. 그녀는 떠나야만 하는 그에게 투정처럼 고백한다. 사랑 없는 결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쓰는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녀 자신은 현실보다 낭만을 택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환상으로 물든 밤, 두 사람은 떠나기로 한다.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해 사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제인은 보고야 말았다.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지를. 현실을 생각해본다. 가난하게 사는 그들과 가난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가족. 결국 현실은 제인을 다시 끌어다 놓는다.
리프로이는 다시 제인을 찾아와 함께 도망치자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을 택한 제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감상에 젖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그들은 재회한다. 성공한 소설가가 된 제인과 여전히 그녀를 추억하는 리프로이. 두 사람은 어떠한 사회적 관계로 맺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낭만 속에 머무른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세상에. 이제 막 학교에서 구구단을 외우고 있던 애가 <오만과 편견>을 읽었으니 무슨 느낌이 들었겠는가. 그 당시 나는 이렇게 싸우다가 왜 좋아하게 되는 거지, 라는 생각에 잠시 그녀의 작품들을 멀리했다. 미묘하고 정교한 사랑이란 감정선을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섬세한 묘사를 하는 걸까. 그 해답을 영화 <비커밍 제인>에서 찾았다.
제인 오스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녀의 소설 속과 달리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굉장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다면 그들의 선택에 힘을 실을 수 있다.
지금이야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고 있지만, 옛날에 여성이 사회로 나가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성공한 여성 작가는 말한다.
자아가 강한 아내는 짐이 되고 명성을 얻은 아내는 수치가 되죠.
아내 겸 작가가 될 수 있냐는 제인의 물음에 그녀는 쉽지 않다고 답한다. 여성이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불공평한 세상에서 제인은 선택을 강요 받는다.
또한, 그 당시는 대가족이 보편적이었다. 제인의 가족은 감자를 캐고 돼지를 기르는 보통 농가이다. 사랑으로 결혼한 부모님은 가난에 지쳐 딸들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고 싶어하고, 제인의 언니들 역시 같은 생각이다.
얻는 건 가난과 고역뿐일걸. 네 애들은 매일 배를 곯겠지.
맨날 끼니 걱정 하며 평생 궁색하게 살고 싶니?
부양해야 할 가족은 많고 그녀가 받을 유산 같은 건 없다. 사랑만으로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다가는 가난이 대물림 될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작가로 자립하겠다는 제인의 말은 허황된 꿈 취급을 받으며, 위슬리의 청혼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받는다.
그렇다고 재산 차이가 나는 집안과의 결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위슬리의 고모인 그리샴 부인은 끊임 없이 제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녀의 집안을 무시한다. 리프로이의 삼촌 역시 ‘가난뱅이 남편 사냥꾼은 용납 못 해’라며 제인과의 결혼을 반대한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차이를 사랑보다 우위에 내세우기도 한다. 위슬리는 제인을 짝사랑하며 그녀가 가진 꿈과 사랑들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의 방식은 제인과 어긋난다. 그가 처음 청혼할 때, 사랑을 앞세우기 보다 상속받을 그의 재산들을 열거하며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쓴다. 제인의 친구는 잘생긴 그녀의 친척 오빠를 돈으로 사로잡으려 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들로 제인은 끊임 없이 선택을 강요 받는다. 로맨스 장르에 충실하지만 그 당시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모두가 성공한 소설가가 되는 제인의 선택지는 지워버리려 하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성공한다. 안타깝게도 사랑했던 남자와의 인연은 맺을 수 없었지만 그는 제인의 뮤즈가 되었고, 그녀는 그 추억 덕분에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었다.
제인은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당차고 용기 있다. 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나 글을 썼다면 단순한 사적유희로 전락했을 것이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결국 사랑도 현실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좌초했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그녀가 원하는 길을 흔들림 없이 선택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에 대한 낭만을 꿈꿀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났다.
사랑하지만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제인은 자신의 경험으로 그렇게 말한다. 소설 속 달콤한 연인들의 해피엔딩과는 다르게 현실은 사랑 이외의 것들이 사랑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켠에는 사랑을 간직하는 것. 영화 <비커밍 제인>의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