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장장이 휴 May 21. 2021

우리는 우리를 대하는 딱 그 방식으로 타인을 대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관대해지고 싶다면,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불효의 현장


  어제 저녁, 엄마 전화가 왔다. 아빠가 복용 중이신 약 때문이었다. 아빠는 건강이 좀 안 좋으셔서 주기적으로 서울에 올라와 병원에 다니시고, 엄마는 못난 아들래미 둘 다 타지로 보낸 상황이라 아빠를 곁에서 혼자 케어하고 계신다. 엄마는 머리가 좋으셔서 여느 어르신(?!)들과는 달리 거의 아빠 복용 약이 바뀔 때마다 모든 약 하나하나의 성분과 이름을 다 외우고 계실 정도다. 그런 명석한 두뇌를 가진 우리 엄마가 큰 아들인 내게 전화를 주신 이유는, 간략히 말하면 아빠가 바뀐 약 하나 때문에 자꾸 좀 마음이 불편하고 몸도 괜히 약 바꾼 후로 안 좋은 것 같이 느끼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그러한 증상을 저번 서울 병원 방문 전부터 알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의사에게 정확히 의사전달을 하시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은 속으로 약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두 분 다 컸는데, 어쩌다보니 그걸 정확하게 이러이러하다고 말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했었어야죠!"


  갑자기 속에서 답답함과 화가 올라온 나는, 퉁명스럽게 이렇게 뱉었다. 속상했다. 나 걱정한다고 엄마 아빠는 어지간해선 내게 당신들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털어놓으시지 않는다.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듯이, 우리 부모님도 그게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무슨 마음인지 대강 짐작은 가면서도,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것도 속상하고, 두 분이서 그 먼 길을(고향에서 서울까지는 왕복 10시간이다.) 오셔서 하고 싶은 말을 의사에게 다 못하고 가셔서 속을 끓이셨을 생각을 하니 자꾸 분노가 치밀었다. 


   퍼뜩 내 어조가 공격적이고 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엄마가 이런 사소한 걱정을 내게 털어놓아주시기까지 무려 34년이 걸린 걸 안다. 그나마 아주 조금씩 겨우겨우 아들래미 걱정시키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본인의 고민을 이야기해주시기 시작하는 요즘인데. 얼른 다급히 톤을 낮췄다. 


  "아.. 근데 환자나 환자가족은 의사 눈치보여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기가 진짜 어려운 거 같아요 엄마. 저도 그거 잘 안 되더라고요. 하.. 그게 진짜 부담스럽고 어렵긴 해요 그쵸."

(여담이지만.. 그래도 나는 진짜 사람됐다. 예전 같으면 툴툴거려놓고는 사과도 못하고 종일 속으로만 후회하는데..)


  엄마가 지그시 웃으셨다. 차라리 고민 고민하다가 아들한테 연락한건데 왜 퉁명스럽냐고 화를 내시지. 아무리 내가 퉁명스럽게 내뱉어도 우리 엄마는 나한테 짜증내지 않는다. 밖에서는 세상 강한 사람이지만, 가족들한테는 세상 따스하고 부드러운 사람.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다. ... 엄마가 지그시 웃으시니,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날 보는 안경으로 엄마를 본 건 아닐까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불쑥 엄마에게 말이 퉁명스럽게 튀어나갈만큼 그렇게나 그게 화날 일이었나. 이제 곧 엄마 아빠도 연세가 환갑이다. 한창 빠릿빠릿하고 거칠 것 없을 젊은 나이인 나도 의사에게 할 말을 까먹거나 눈치보느라 못하고 나올 때가 있다. 이제 눈도 침침한 연세인 엄마아빠는 오죽할까. 뭐가 그리 화가 나고 짜증이 난걸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화가 난 이유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까지는 아니다. '내가 날 대하는 잣대와 기준을 은연 중에 부모님에게 적용하고서는, 속상해하고 화낸 것 같다.' 이게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는 은연 중에 내 행동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잣대를 부모님에게 들이대고서 답답해했다. 머리로는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시니 어쩌니 저쩌니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어느새 나한테나 들이댈법한 '엄격한' 잣대와 완벽함을 요구한 것이다. 네살 다섯살 한글도 잘 못읽을 때 하나하나 다 챙겨주고 달래가며 병원 데려다 준 부모님의 마음은 역시 자식이 감히 흉내낼 게 못되는건가보다.


우리는 우리를 대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한다


  언젠가 나는 내로남불이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내로남불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양심없는 부류들이 쉽사리 실천에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하듯이,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대한다. 딱 나를 대하는만큼 그렇게만. 유교문화 고유의 덕목 중 하나로 외유내강을 꼽곤 하지만, 내 '무지성 관심법' 관점에서 볼 때 그건 아주 높은 확률로 위선이다. 아... 외유내강인 많은 분들의 비난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ㅋㅋ 나도 외유내강을 지향은(!) 한다는 걸 밝혀두고 싶지만, 외유내강이 아주 높은 확률로 위선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왜냐면, 내가 잘 안 되니까.... 그거 잘되는 놈들도 그냥 위선 떠는 거였으면 좋겠ㅇ... 


  우리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는 행위는 대개 도덕관념이나 가치관에 의한 것일 경우가 많다. 절대로 밤 6시 이후에 야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가 자정마다 배고픔을 못참고 야식을 먹고서 못참겠다고 투덜거리는 걸 진심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다. 물론 그 사람이 야식을 못 끊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고, 경멸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런 생각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저거, 결국 자기 의지에 달린건데.'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아이는, 반에서 40등 안팎인 친구를 보며 절대 노골적으로 공부 못한다고 놀리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무의식에서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 등수는 그냥 자기가 공부를 안해서 그런건데. 열심히 하면 저 등수일 리가 없는데.' 돈을 어느 정도 이상 버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극빈층에 대해 그런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고, 날씬한 사람들은 살찐 사람들을 보며 그런 마음을 무의식 깊은 차원에서는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나의 의심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가지는 잣대를 타인에게도 들이댈 수 밖에 없다. 아주 아주 솔직해지는 차원에서는 말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그래서 나는 엄마 전화를 받고 화를 낸거다.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의사 눈치보느라 자기 할 말 못하는 것을 못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런 잣대로 내가 나를 대한다는 걸 안다. 엄마 아빠가 이제는 눈이 침침한 연세가 되어가고 있든 어쨌든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나에 대해 내가 엄격한만큼 딱 그만큼 엄격하게 평가기준이 적용되는거다. 엄마 아빠에 대해 그런 식의 생각을 하는 자체를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선비식' 가치관이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 내뱉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얼굴에 확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하다가 '아차' 했던 순간에도, 저런 생각이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직면하면 너무 내가 X새끼 같잖아...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거다 결국. 내가 답답해하고 화난 이유를 보면... 사실 이런 일은, 하루에 열번도 더 일어난다. 머리로는, 도덕적으로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한테 차갑고 엄격한 딱 그만큼 남들에게도 똑같이 차갑고 엄격하다. 우리는, 우리를 대하는 딱 그만큼 남을 대한다.


타인에게 관대하기 위해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


  그러니, 스스로를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가 '진정으로'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나마 생긴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완벽함을 바라고 엄격하게 대하면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부드러울 수 있다는 건, 내 눈에는 위선이고 가식이다. 겉으로 그렇게 연기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진심은 은연 중에 소리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공부를 못하고 살을 못 빼는 연인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면, 내가 정말 노력해도 성적이 50점 밖에 안 나오거나 살이 하나도 안 빠질 수도 있다는 여지를 스스로에게 먼저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을, 그렇다고 해서 니가 손가락질받을만한 건 아니라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먼저 내줄 수 있어야 한다. 


  '니가 절대 못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진짜야. 하지만 내가 너처럼 성적을 90점도 안되게 받거나 살이 쪄서 과체중보다 더 살이 찔 리는 없어. 난 그래서도 안 되고.' 


  이게 어떻게 느껴지려나 모르겠다. 이게 나랑 전혀 무관한 이야기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일어나려나. 만약 이 대사가 좀 거슬리거나 나도 마음 속 한 켠에는 이런 느낌의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든다면, 그 생각을 곧바로 떠나보내지 말고 잠깐 마음에 머무르게 해보길 권한다. 


'스스로에게 관대하다'는 것의 의미


  스스로에 대해 관대한 것에 대해 우리는 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그런 경향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가 부지불식 간에 우리 내면으로 받아들여서 장착해놓은 문화적, 사회적 통념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권에서 통상적으로 말하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사람'은 실은 '날 외면하는 사람'이다. 내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외면하고, 내 초라하고 망신스러울만한 모습을 내 모습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보다 인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못본척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애써 합리화하고 변명하는거다. 이건 스스로에게 관대한 게 아니다. 외면은, 일종의 거부일 뿐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공감하는 것도 아니다. 공감도 못하겠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겠으니 고개 돌려 외면하는거다. 스스로에게 관대한 사람은, 본인의 비루하고 못난 마음과 치졸하고 수치스러울만한 모습도 내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애정을 가지고 용서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근데 이게 본인한테 되기 시작해야! 그 때야 비로소 내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이게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먼저 관대해져야 한다.  


  나도 안다.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 된다. 매일같이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지만, 실천은 또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주는 일은, 근성과 깡으로 이악물고 무언갈 이루어내는 것과는 또다른 부류의 어려움이자 도전이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노력해보자. 당신 스스로가 아니라면, 당신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작가의 이전글 [논문]평가염려 완벽주의와 불확실성에 대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