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우리는 실패할 게 분명하지만, 그건 나나 당신의 잘못이 아닐지도
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은,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실패란 무엇일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실패란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내게 있어서도 실패는, "내가 계획하고 목표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건", 즉 내가 뜻한 대로 되지 않은 일을 의미했다. 내가 목표로 한 시험성적, 내가 원했던 연봉, 내가 얻고자 했던 직장과 내가 만들고 싶었던 체중과 체지방량, 내가 바랐던 수많은 것들은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좌절했다. '실패'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실패로 채워왔을까. 내가 해왔던 연애들은 결국 소위 종착지라 일컬어지는(물론 개인적으로 결혼은 시작점이지 종착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튼.)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 또한 내게는 내가 기대했던 결과로 끝나지 않았으니 모두 실패였다. 20대 때 배낭여행 중 내가 생각했던 기차시간을 놓쳐버리거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 문을 닫아 들어가보지 못한 일, 예기치 않게 몸살이 나서 하루 계획이 어그러진 일 이런 크고 작은 셀 수 없이 수많은 일들이 내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실패라 여기며 참 많이도 슬퍼했고, 이런 크고 작은 실패들은 내 삶의 페이지 중 어느 곳을 펼치더라도 언제나 존재한다.
이렇게 숱한 실패를 곁에 두고 살아왔다고 해서, 내가 그 실패라는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더 의연해졌거나 익숙해졌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딴에 열심히 한다고 했던 고시공부를 포기했던 날, 이번에는 마지막 연인이길 바랐던 사람과 헤어졌던 날, 예기치 않게 크게 다쳤던 날, 의도하지 않게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던 날. 이렇게 내가 '뜻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크게 상처를 입었고 속으로 많이 울었다. (물론 속으로만 많이 울었다. 내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다 보여주는 건, 내게는 또다른 '실패'였으니까.) 골백번도 더 마주한 실패들이었지만, 나는 전혀 실패에 익숙해지지도 의연해지지도 못했다.
여느날처럼 또 이런저런 실패를 하던 어느날, 나는 속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도대체 왜 내 삶은 이렇게 실패의 연속인거지? 왜 내가 세운 목표대로, 내 계획대로,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거지?' 잠시 후 역시 여느날처럼, 나는 나에게 대답했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뭐. 정말 간절하지 못해서 그래. 정말 간절하다면, 실패하지 않아.' 매번 나와 주고받는 대화였다. 실패에 좌절하고 고개숙인 나에게, 또다른 내가 건네는 말은 언제나 더욱 열심히 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느날과 다르게 하루는 고개숙인 채 좌절하며 끄덕이던 내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더?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게 맞아?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게 확실해?' 일종의 반란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 때 이런 반란을 일으킨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경악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점철되어 화를 내는 꼴을 보라며 나를 비난하고 경멸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한 때 삶의 모든 일들이 정말 절실하고 간절하면 반드시 목표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수많은 책과 영화, 학교 선생님들은 분명 내게 그렇게 일러주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말했다지 않나.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나는 삶이라는 게 그런건 줄 믿었다. 그랬으니 내게 실패의 정의가 '내가 계획하고 목표한 것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건'이었을테지. 그래서 실패는 모두 내 탓이었다.
나의 이런 가치관 탓에, 나는 사는 내내 나를 채찍질해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생겨먹은 그대로의 나'와 '내가 계획하고 목표로 하는 나'는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계획하고 목표로 하는 내 모습은 지금 내 모습이 아니었다. 표준국어대사전과 내 실패의 정의에 따르면, 분명 이건 실패였다. 나라는 사람이 내가 뜻한 바대로, 내가 계획하고 목표한 모습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내게는 나 자신이 실패였다. 그리고 그 실패는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실패란, 덜 노력하고 덜 절실해서 얻게 되는 것이니까. 나 스스로에게 실패였던 나는, 그렇게 내게 계속 채찍질을 해댔고 내가 휘두르는 채찍질을 참아가며 더욱 노력했다.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 웃픈 상황은 내 삶 전반에 걸쳐 지속되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내 계획대로 목표대로 생겨먹어주지 않은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을 언제나 실패작이라고 비난했다. 얼른 내가 뜻한 바와는 다른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을 갈아치워버리길 원했다. 물론 그게 그렇게 쉽사리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 번씩 깊은 좌절과 슬픔에 잠겼다. 도대체 이 해소되지 않는 '실패'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목표한대로,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건인 '실패'는 나 자신이라는 가장 1차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대참사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실패 그 자체였고, 당연히 내가 주인공인 내 삶도 실패일 수밖에 없었다.
삶은 실패와 무슨 관계에 있을까. 실패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적힌 것처럼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실패하지 않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지금 나의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삶은 그 본질적인 특성 상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 '나비효과'를 보면, 주인공이 어떤 작은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면 이것이 우리의 삶과 연관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을 거치면서 전혀 예기치 못한 엄청난 변화를 낳기도 한다. 이러한 삶이라는 녀석을 우리가 뜻한 대로만 통제해나갈 수 있는 것인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삶이 불확실하다는 명제를 만약 수용한다면, 실패, 즉 '뜻한대로 되지 않는 일'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불확실하고 우리의 통제권을 벗어나있는 녀석이 삶이다. 그렇다면 '실패'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만큼 그렇게 나쁘고 우리의 잘못인 동시에 우리가 후회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실패'의 정의 뒤에다가 부제로 '삶의 가장 첫번째 대전제', 혹은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우리 삶에 반드시 계속 일어날 일'이라고 써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거야'라는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하는 걸 안다. 누군가가 실패한 나를 위해 그렇게 위안을 해줄 때, 그 마음만으로도 분명 큰 힘이 되었던 많은 순간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생각에, 앞으로도 나와 당신의 삶에 분명히 계속 실패가 찾아올 것이라고. 나와 당신은 분명히 내일도 다음주도 내년도 또 수천번을 더 실패하게 될 거라고. 바꾸어 말하면, 우리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이상, 당연히 삶은 우리 뜻대로 흘러갈 수 없다. 그러니 삶의 잘못이라면 잘못인 '불확실성'의 다른 표현인 '실패'를, 자꾸 당신의 잘못으로 돌려서 당신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 스스로를 힐난하며 오랜 시간을 지내왔던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실패가 나의, 당신의 잘못은이 아니라는 말. 자꾸 같은 말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실패는 그 정의상 그냥 삶의 당연한 전제 같은거다.
그러니, 인생의 본질적인 특성이자 필연적인 전제인 '실패'를 당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슬프게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패는 그냥 '삶' 자체일 뿐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는 게 너무나 어색하고 희안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길 바라는 것이 내가 신이 되고자 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한 욕심일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실패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낯선 일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곧 실패니까 말이다. 그러니, 실패와 조금 친해져보자. 나는 그토록 힘겹고 슬프던 '실패'와 조금씩 가까워져가고 있는 중이고, 그러면서 내 삶은 참 많이 따뜻하고 평온해져가고 있다. 이 감사한 경험이 당신에게도 무언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