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13일, 제임스 러블은 일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돌멩이가 선체에 충돌한 줄 알았다. 그러나 무심결에 창문 너머로 자신이 탄 기체를 보니 하얀 입자가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 사달이 난 장소는 지구에서 321,860km나 떨어진 지점, 적막한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아폴로 13호였다.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러블은 휴스턴에 그 유명한 통신을 보냈다.
“Houston, we’ve had a problem.”
조사 결과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우주선의 산소탱크 두 개가 모두 파손돼 우주비행사들의 생명줄인 산소가 새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세 번째로 달에 착륙하려던 임무는 순식간에 세 명의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대미문의 비상사태에 NASA의 거의 모든 인재들이 총동원돼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아폴로 13호의 ‘성공적 실패’
현재의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알고 있다. 세 우주비행사는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고, 아폴로 13호는 ‘성공적인 실패’라는 위대한 수식어를 얻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돼 평단과 관객을 호평을 받았다. 나름 해피엔딩인 셈이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의 이면에는 어떤 난관이 있었는지 종종 간과되곤 한다.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과 휴스턴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미로에 던져져서 출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하나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 없었다. 산소 수치가 곤두박질치고 연료전지가 바닥나는 것만으로도 산소탱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가 얼마큼 파손됐는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확인하려면 우주비행사가 우주선 밖으로 나가 육안으로 관찰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우주유영 장비도, 공간도 없는 아폴로 13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폴로 13호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원래 아폴로 13호의 사령선을 조종하기로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지상에 남은 켄 매팅리와, 매팅리를 대신해 아폴로 13호에 탑승한 예비 조종사인 존 스와이거트였다. 스와이거트는 아폴로 우주선 사령선의 작동 절차를 정리한 장본인이었다. 당연히 사령선 조종에 필요한 모든 것을 훤히 꿰고 있었다. 매팅리는 정규팀의 사령선 조종사였으니 우주비행사들이 이야기하는 우주선 내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매팅리는 현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 알았으며, 스와이거트는 휴스턴에서 엔지니어들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이해했다. 이 두 사람의 활약 덕분에 우주비행사와 관제센터는 절묘한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었다.
특히 매팅리의 역할이 중요했다. 매팅리는 관제센터에서 '통역'의 역할을 담당했다. 스와이거트가 우주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이를 매팅리가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했다. 덕분에 지상에 있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아폴로 13호의 현재 상황을 생생하게 공유하며 실시간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특히 아폴로 13호의 궤도를 조정할 때 팀워크가 빛을 발했다. 사고 당시 아폴로 13호는 기계선의 산소탱크가 파손되어 연료전지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우주비행사들은 전력을 극도로 아끼느라 자동조종장치나 항법 컴퓨터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우주비행사들은 일일이 제 궤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작값을 손으로 계산했는데, 작은 계산 실수로도 지구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실수를 허용치 않는 작업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사령선의 상태가 좋지 못해 우주비행사들이 달착륙선으로 피신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아폴로 13호의 무게중심이 사전에 계획한 것과는 달라졌고, 사령선에 맞춰서 입력되어 있던 비행데이터를 달착륙선에 맞게 보정해서 옮겨야 했다. 심지어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라 어떠한 매뉴얼도 없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휴스턴의 관제센터는 빠르고 정확하게 보정값을 계산했다. 스와이거트는 어떤 정보를 전달해야 지상의 엔지니어들이 제대로 계산할 수 있는지 알았고, 매팅리는 현재 아폴로 13호의 상태를 소상히 추측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달착륙선의 이산화탄소 농도 문제를 해결한 과정 역시 우주비행사와 관제센터의 팀워크를 잘 보여준다. 우주비행사들이 피신한 달착륙선은 정원이 두 명이라 이산화탄소 제거기의 용량이 모자랐다. 어쩔 수 없이 사령선의 것을 떼어다 달착륙선에 이식하려고 했지만 사령선과 달착륙선의 이산화탄소 제거기 규격이 달라서 호환되지 않았다. 관제센터에서는 엔지니어들이 모여 우주선 안에 있는 재료만으로 이산화탄소 제거기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우주비행사들은 이를 충실히 활용해서 질식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비결, 시뮬레이션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아폴로 13호가 귀환하는 과정에서 스와이거트와 매팅리의 역할은 ‘시뮬레이션’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팅리는 스와이거트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관제센터에서도 아폴로 13호의 내부 상황을 훤히 알 수 있게 했다. 현대의 시뮬레이션처럼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한 것은 아니지만, 우주선의 상황을 수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알고리즘화하고 이를 문제 해결에 적용한 방식 자체는 시뮬레이션의 작동방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시뮬레이션은 흔히 ‘특정한 현상을 재현한 모델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나 연습’ 정도로 이해된다. 일반인에게는 비행기 조종사 훈련에 사용하는 비행 시뮬레이터가 아마 가장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의 범위는 이보다 넓다. 시뮬레이션은 실제로 실험하기 곤란한 현상의 해답을 찾거나 실제 실험 전에 이론적인 값을 구하는 데 활용된다. 예컨대 전자제품을 개발할 때 제대로 작동 가능한 설계안을 찾기 위해 이론상의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나, 대형 운석이 충돌하는 것처럼 실제 실험이 불가능한 상황을 모사하는 것 모두 시뮬레이션의 한 종류다.
시뮬레이션은 이처럼 특정 상황에서 주어진 조건에 대한 해답을 찾는 목적으로 탄생했기에, 분명한 결괏값을 산출하는 학문인 수학, 특히 응용수학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시뮬레이션은 ‘현실을 수학적인 모델로 재현하고 모의적인 연산을 되풀이해 그 특성을 파악하는 일’로 정의된다. 이상적으로는 연산을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수업이 반복해서 통계적인 방법으로 최적의 해를 찾아내며, 이 때문에 시뮬레이션은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해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실을 수학으로 재현하려는 노력은 전쟁터에서 시작됐다. 18세기 유럽에서 화포 기술이 발전하면서 포병은 전장의 주역으로 자리 잡는다. 지금과 같은 첨단 장비가 없는 당시에는 정확하게 포격하려면 포탄과 장약, 대포의 각도에 따라 포탄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예측할 수 있어야 했다. 당대의 학자들은 뉴턴 역학과 미적분학을 이용해 조건에 따른 포탄의 궤도를 계산하고 각종 제원표를 산출했으며, 고등 수학과 물리학이 포병 장교의 필수 지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학문은 ‘탄도학’이라는 별도의 분야로 발전했다. 포병과 수학의 이러한 관계는 군 생활을 포병으로 보낸 사람에게도 그다지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포병의 제원 산출 과정은 시뮬레이션의 작동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선 타격 목표지점과 현재 포대의 위치를 확인한다. 여기에 목표와의 거리와 고도차,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고 이를 사전에 정의된 수학적 모델에 대입하면 사격 제원과 장약량이 산출된다. 계산값에 따라 초탄을 발사한 후에는 탄착점에 따라 보정하며 정확도를 높인다. 즉 특정 상황(화포를 발사한다)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고, 초기 조건(목표와의 거리나 풍향, 풍속 등)을 대입해 필요한 결괏값(사격제원)을 얻는 것이다.
이후 수학이 점점 정교해지고 계산기계도 발전하면서 점점 복잡한 상황을 수학적인 모델로 다룰 수 있게 됐다. 컴퓨터의 발전으로 복잡한 계산을 빠르게 처리 가능해지자 포탄의 궤적을 계산하던 단순한 알고리즘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과 각종 기계의 복잡한 작동을 실시간으로 재현할 정도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응용사례가 비행사의 시뮬레이터다. 베트남전쟁 때 미국 해군은 조종사 양성 비용을 절약하고 숙련도를 높일 목적으로 ‘탑건’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조종사들을 훈련한 바 있다. 탑건 프로그램에 사용되는 장비는 조종사의 정면과 양 옆의 스크린에 전장을 투영하고 실제 전투기의 계기판을 그대로 구현해서 가상 전투를 할 수 있는 시뮬레이터였다. 해군이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동안 미 공군은 그런 기계를 갖고 놀 시간에 훈련을 하는 게 낫다며 실제 비행훈련만을 고집했다. 결과는 해군의 압승이었다. 탑건 프로그램으로 훈련한 해군의 교환비는 13대 1까지 올라갔지만 공군의 교환비는 1대 1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군사 분야에서 시작된 기술 대부분이 그렇듯, 시뮬레이션도 민간의 여러 분야에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의 장점은 분명했다. 해군 비행단의 사례에서 보듯, 시뮬레이션은 실제로 수행하기에는 자원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효율적으로 시험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산업 분야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시뮬레이션을 이용하면 도시계획처럼 실험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분야에서는 새로운 길을 내거나 구역을 정비할 때 예상되는 상황을 미리 파악할 수 있고, 신제품을 설계할 때도 파일럿 제품을 수백 개씩 새로 만들 필요 없이 최적의 설계안과 생산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최근에는 범죄를 재구성하거나 수술을 계획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서는 법의학 정보를 시뮬레이션으로 재구성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엇으로 어떻게 공격했는지, 현장에서 가해자는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스템을 선보였다. 취리히대에서 개발된 범죄 시뮬레이션은 법정에서 그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객관성과 정확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UCLA와 뉴욕대학교는 미국의 대형 병원인 마요클리닉과 협력해서 수술 시뮬레이터를 만들기도 했다. 이 시스템은 MRI와 CT, 초음파 정보를 이용해서 환자 개인의 장기 구조를 3D로 구현하는데, 의사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기 어려운 종양을 발견하거나 수술계획을 정밀하게 짜는 데 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의 적용 영역은 ‘마음’을 다루는 데까지 활용된다. 사우스캘리포니아대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성장애(PTSD)나 공황장애, 공포증을 앓는 사람을 치료할 목적으로 '브레이브마인드'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일반적으로 공포증은 환자가 공포감의 원인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게 함으로써 치료한다. 브레이브마인드는 환자들이 증상의 원인이 된 상황을 생생하게 다시 체험하게 함으로써 종전의 상담 요법에 비해 빠른 회복을 이끌어낼 수 있다.
시뮬레이션에 날개를 달아준 현실의 쌍둥이, 디지털 트윈
이처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는 시뮬레이션이지만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테스트하는 대상의 현재 상태를 실시간으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뮬레이션은 미리 정의된 알고리즘에 선별된 초기 조건을 대입하여 연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있지만 실제 현실과 100% 부합하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시뮬레이션을 설계하고 결괏값을 해석하는 데 ‘통계적’인 방법이 필요한 이유도 시뮬레이션 자체가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충돌안전검사를 생각해 보자. 자동차는 탑승자의 생명과 직접 연관된 기계이므로 새로운 자동차를 개발하면 반드시 충돌시험을 거쳐야 한다. 자동차가 다양한 상황에서 충돌했을 때 탑승자의 안전이 보장되는지 확인하려면 테스트용 차 안에 사람을 대신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사용하는 것이 ‘더미’라고 불리는 마네킹이다. 인체의 골격과 관절은 단순화하여 재현한 더미를 차에 태우고 여러 차례 실제로 충돌시켜서 더미의 어느 부분이 손상되는지 확인하면 탑승자가 얼마나 안전할지 예측할 수 있다.
과거에는 차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충돌 순간을 고속 촬영해서 더미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안전성을 판단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어느 부위에 얼마만큼의 힘이 가해지는지, 이로 인해 출혈은 어느 정도고 신경계는 얼마나 손상되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탑승자의 신체 조건이나 연령대에 따라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지, 충돌각도의 미세한 변화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확인하기도 불가능하다. 노면 상태처럼 미세하게 변하는 외부 요인들도 반영되지 않는다. 이래서는 충돌시험만으로 안전을 완벽하게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시뮬레이션의 태생적인 한계다. 시뮬레이션은 컴퓨터의 연산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알고리즘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에 영향을 주지만 중요하지는 않은 자잘한 요소들은 배제된다. 컴퓨터의 연산능력은 유한하기에 시뮬레이션의 복잡도를 일정한 수준으로 제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뮬레이션의 세계는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잘 정제된 세상이다. 흔히 ‘현실성 높은 시뮬레이션’이라는 찬사를 받는 게임들을 했을 때 실제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유도 알고리즘으로 구현한 세상이 변화무쌍한 실제 현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의 한계는 연구자나 엔지니어들도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조금이라도 더 현실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컴퓨터의 연산능력 발전에 맞춰 알고리즘을 고도화하거나 변인의 종류를 늘리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든 ‘실제 현실이 실시간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알고리즘 설계와 데이터 선택 단계에서 연구자, 또는 설계자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현실의 정보를 시뮬레이션에 그대로 쏟아부어보자’는 아이디어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의 정보를 그대로 시뮬레이션에 가져오면 변화무쌍한 현실에 가까운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최근 급격히 발전한 머신러닝 기술을 접목하면 사람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많은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도 의미 있는 알고리즘을 추출할 수도 있다.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라 현실 세계에서 테스트한 결괏값을 다시 시뮬레이션으로 피드백해 알고리즘을 점점 정교하게 진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다시 자동차 충돌 시험으로 돌아가 보자. 요즘 충돌 시험에 사용하는 더미는 쇼윈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형처럼 생겼지만, 실은 한 기당 10억 원이 넘는 귀하신 몸이다. 좋은 나무를 써서가 아니라 더미 요소요소에 각종 센서가 장착됐기 때문이다. 골격, 관절, 표면을 덮은 피부 등 부위에 따라 다른 센서가 장착된다. 센서는 충돌 순간 가속도나 충격량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분석 컴퓨터에 무선으로 전송하며, 이를 통해 상해 정도, 출혈량, 신경계 손상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피해 분석 알고리즘에 반영되어 시험 횟수를 거듭할수록 정교한 분석모델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시뮬레이션은 사전에 정의된 틀을 따르지 않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따라서 기존의 시뮬레이션과 달리 현실의 실제 모습을 실시간으로 컴퓨터가 만든 가상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 현실의 복잡성까지 담아낸, 진정한 현실의 ‘쌍둥이’, 즉 ‘디지털 트윈’인 셈이다.
산업을 바꾸는 디지털 트윈
센서와 네트워크 기술을 접목해 현실을 구현한 ‘디지털 트윈’은 과거에는 개념상으로만 존재했다. 첫 등장은 미국의 컴퓨터 공학자, 데이비드 젤런터(David Gelernter)가 1991년 발표한 책인 ‘미러 월드’에서다. 젤런터는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 세계를 거울상처럼 가상현실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디지털 트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플로리다 공대의 마이클 그리브스는 2002년 디지털 트윈 개념을 생산 라인에 접목해 제품의 생애주기를 추적하고 관리하는 데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해 대중화시켰다.
젤런터와 그리브스에 따르면 디지털 트윈이 적용된 생산 라인의 각 요소들은 더 이상 관리의 객체가 아니다. 센서에서 수집된 정보들은 단순히 해당 라인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센서가 ‘내가 무엇이고, 어떤 정보를 제공하고, 어떤 부분과 연계되는지’에 대한 정보를 능동적 주체로서 전달한다. 사람이 라인의 이상을 보고 받고 이에 따라 조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 라인의 각 부분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현재의 생산 계획에 맞게 능동적으로 조절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기존의 시뮬레이션과 가장 큰 차이점인데, 디지털 트윈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현실을 모사해서 테스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보를 가상세계에 구축해서 스스로 조절될 수 있게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실제 기계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인공지능이 직접 정보를 읽어 들이고 관리할 수 없으니 기계의 사본을 디지털 정보의 형태로 가상세계에 만드는 것이다. 가상의 디지털 세계에서 처리된 정보는 실시간으로 현실의 기계에 반영돼 전체 생산 라인이 유기적으로 조절된다.
디지털 트윈 개념은 이후 연구가 급진전해 원형(digital twin prototype, DTP), 객체(digital twin instance, DTI), 집합체(digital twin aggregate, DTA)로 세분화된다. 원형은 제품의 디자인이나 공정 등 현실을 구현한 알고리즘을 말하며 현실의 객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객체는 현실의 사물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데이터 자체를 말하며, 집합체는 객체들이 모여 머신러닝이나 분석에 활용되는 유의미한 데이터 집합을 뜻한다. 디지털 트윈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므로 고전적인 시뮬레이션처럼 특정한 상황으로 일반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디지털 트윈으로부터 얻는 유의미한 정보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 활용예(유스케이스)로 표현된다.
현재 디지털 트윈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제조업에서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는 데 널리 사용된다. 선두업체는 제너럴 일렉트릭(GE)과 롤스로이스다. 두 기업은 디지털 트윈에 기반한 항공기 엔진 제조 서비스를 사업화했다. 시판된 엔진에 센서를 부착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기업의 중앙 관제실에서는 이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고객들에게 엔진 상태와 에너지 절감 솔루션 정보를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GE와 롤스로이스는 고장 없이 사용한 기간에 비례에 엔진 대금을 청구함으로써 수리로 인한 운휴와 비용에 불만이 많았던 고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국내 산업 현장에도 디지털 트윈이 활용된다. 포스코 포항 제2 용광로에는 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 기술이 접목돼 있는데, ‘상공정(upstream)’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해 분석하는 역할을 한다. 상공정은 생산 공정의 에너지 효율이나 제품의 품질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고온, 고압 환경이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워서 적절한 솔루션을 도출하기 어려웠다. 용광로에 적용된 디지털 트윈은 용광로 내부의 쇳물 온도와 연소상태 데이터를 센서를 통해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최적의 제선(iron making) 방안을 내놓는다.
현재 산업계에서는 디지털 트윈을 이용해 진일보한 생산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듯이 생산라인을 조합하여 고객의 다양한 니즈에 대응하는 ‘모듈러’ 팩토리다. 독일의 인공지능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된 모듈러 팩토리는 주문에 따라 실시간으로 설비 일부를 바꾸고 업무를 변경하는 공장이다. 각 모듈은 소형 컨테이너 크기로 규격화되어 여러 공장 간 협업 제조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소량 맞춤 생산을 저비용으로 자동화할 수 있어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수요에 대응해 실시간으로 생산량을 관리해야 하는 발전 분야에도 활발하게 활용된다. GE는 ‘디지털 파워플랜트’라는 이름으로 발전소 운영에 디지털 트윈을 도입했다. 디지털 파워플랜트는 발전 시설 내에서 생성되는 모든 데이터를 디지털 시스템에 통합하여 만든 ‘가상 발전소’다. 실제 발전소의 모든 설비에는 사물 인터넷이 장착되어 센서를 통해 압력, 온도, 진동, 환경 변수 등의 자료를 생성한다. 가상 발전소에서는 이 데이터를 분석해 발전 시설을 최적화하고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예측할 수 있다. GE에 따르면 전 세계 석탄 발전소에 디지털 트윈을 적용하면 연간 6만 7,000톤의 석탄 소비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디지털 트윈은 시뮬레이션을 시험과 미래 예측의 영역에서 현실을 직접 제어하는 영역으로 옮겨 왔다. 제4차 산업혁명에 따라 일어날 향후의 산업 분야 대격변에서 디지털 트윈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