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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Jan 19. 2022

웰컴 투 항암월드 57화

실화 소설

  양이 감은 눈을 떠 보니 어느덧 점심 무렵이었다. 잠깐 나갔는지 금희는 안 보였다.


  이때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수간호사가 들어와 미자에게 갔다. 양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미자님, 4인실의 정리가 끝났습니다. 지금 옮기시겠어요?”


  “4인실에 난 자리가 어디라고 하셨죠?”


  “출입문 앞이오.”


  “아시겠지만, 저는 창가 자리를 원했거든요. 2인실에서 창가 자리에 있어 보니 참 좋아서요.”


  “아깐 괜찮다고 하셨는데요?”


  “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출입문 쪽은 너무 어두울 것 같아서요. 다음에 창가 자리가 나면 옮겨도 될까요? 창가 자리면 4인실도 6인실도 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음을 바꿔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병실을 나서는 수간호사의 표정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커튼에 가려 미자에겐 안 보이겠지만, 양은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건넸다.


  “저… 정말 감사드려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차르륵. 둘 사이의 하얀 커튼을 걷으면서 미자가 웃는 얼굴을 내밀었다. 하얀 털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별말을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그 사람이 다시 옆에 오면 어떡하나, 정말 끔찍했는데… 아, 그렇다고 지혼자 할머니가 엄청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저희랑은 안 맞았어요. 근데 이번에 안 가셨다가 4인실이나 6인실에 창가 자리가 얼른 안 나면 죄송해서 어떡하죠?”


  “언젠간 나겠죠, 뭐. 안 그럼 항암 치료도 시작된 김에 그냥 여기서 쭉 지내면 되죠, 뭐. 훗훗.”


  듣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웃음이었다. 양도 따라 웃게 만드는.


  미자가 말을 이었다.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난 정말로 창가 자리를 기다리니까. 그나저나 고생이 정말 많아요. 옆에서 보기 안쓰러워 죽겠어요. 면역력이 제로로 떨어지면 나도 그럴까요? 아가씨가 겪는 일들이 남 일 같지가 않아서 벌써부터 무서워요. 으휴, 머리카락이 벌써 이렇게 뭉텅이로 빠질 건 뭐람!”


  슬며시 털모자를 벗는 미자의 머리는 양보다 더 듬성듬성했다. 보기에 괜찮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는 아직도 머리카락이 그대로 같은데, 나는 항암제가 들어가면서부터 이렇게나 빠지네요. 미는 게 좋을까요?”


  “저도 정말 안 밀고 싶었는데, 머리를 오래 안 감으면 세균이 생긴대요, 주치의의 말이요. 그래서 밀고 나니 시원하고 좋더라고요. 하하.”


  “으휴, 그럼 나도 밀어야겠다.”


  이때 금희가 들어왔고, 미자는 커튼을 닫으며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또 얘기해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금희가 무슨 일이냐며 눈짓으로 물었다.


  “엄마, 엄마! 옆자리 분이 4인실에 안 가신대! 너무 잘됐지?”


  “정말?”


  “응! 창가 자리가 나면 가기로 하셨어.”


  “정말 너무 감사하네!”


  “응응! 이제 걱정 놨다. 그치?”


  “그래그래. 실은 엄마도 수간호사를 만나고 왔어.”


  “응? 왜? 또 화낸 건… 아니지?”


  “아니야. 물론 화는 나지만! 어쩌겠어, 우리가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데.”


  금희는 수간호사와 나눈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동안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지혼자가 못 오도록, 딸애의 마음이 힘들지 않게 도와 달라, 우리 딸을 제발 좀 살려 달라고…


  금희의 말을 들으며 젖어든 눈가를 보자 양도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차분하게, 스스로를 버리고 눈물로 부탁했다는 사실에.


  병원 생활에서 오는 짜증을 엄마에게 풀고 싶을 때, 오늘을 기억하자.

  양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화요일, 양의 과립구는 899.


  어제의 911에 비해 살짝 내렸지만 머무른다고 봐야 했다. 지난주 화요일에 0이었으니 일주일 만에 확실히 높아진 셈이었다. 기분 탓인지 양은 목도 발목도 덜 아프게 느껴졌다.


  안과 의사가 다녀간 결과, 눈도 혈소판이 올라가면 곧 회복되리란 진단을 받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는 핏덩어리로 밝혀졌다.


  “하, 양 씨. 지혈제의 부작용입니다. 핏덩어리가 몸 안에서 혈관을 막으면 부정맥이 발생할 수 있는데, 밖으로 나와서 다행입니다. 오늘부터 지혈제의 양을 줄였으니 지켜보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제나처럼 심해는 양호하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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