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점을 극복하는 것의 의미

나를 죽인 자리를, 더 나은 내 모습으로

by rechoice

몇 달 전에 조이와 '단점을 극복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한 적 있습니다.


그 때 조이가 연구실에서 (본인 생각에) 약간 무리한 부탁을 받아서 꽤 화나 있는 상태였는데요. 부탁을 한 사람이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며 아주 불쾌해했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엔 그럴 일까지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조이의 핵심 감정인 '무시당하는 기분'을 건드리는 사건이구나 싶어서, 장난스레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왜~ 그러니까 그냥 딱! 거절해버리지 그랬어. 너 요즘 한가해? 그런 거 다 받아주게~"


그랬더니 조이가 삔또가 상해서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게까지 빈정상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전화가 끊기니까 저도 감정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마음을 고쳐먹고 먼저 사과했어요. 나중에 같이 양꼬치를 먹으러 갔던 자리에서, 조이가 그 날 먼저 손 내밀어 줘서 고마웠다고 말했습니다.



"조이야, 나는 요즘 사람에 대한 용서가 쉬워."


그런데 지금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한때 그것이 제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하면, 한때 제가 굉장히 냉정하고, 타인에게 바운더리를 허용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날카로운 말을 뱉어서 무필터 정수기란 별명을 가졌던 사람인 걸 알면 그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나 있을까요.


저는 자기 강단과 고집 있고, 자존심 세고, 욕심과 승부욕 많은 진성 ENTJ 성격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혼자 뚝심 있게 많은 일을 해 왔어요. 하지만 그 이면으론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 먼저 손 내밀기 어렵고, 내가 맞다고 /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남에게 날카롭게 말하는 걸 서슴지 않았습니다. 내 자존심을 굽혀가면서까지 상대방을 위하는 것도 싫었어요.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툭 뱉어버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엄마가 이렇게 조언하셨어요. "네가 자신의 감정이 조절이 안 되고, 바로 날카로운 말로 뱉어버리는 건 배운 사람의 행동이 아니야. 네 판단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남에게 강하게 말하는 것도 사실은 무례야. 네가 남들에게 배운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으면 반드시 고쳐야 하는 부분이야. 정제하지 않고 느낀 대로 표출하는 사람이라면 짐승과 다를 게 뭐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해서 눈물만 뚝뚝 흘리곤 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제가 싫었어요. 그런 성격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화를 참지 않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데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저도 부끄러웠습니다. 돌아서면 후회했어요. 하지만 단점을 극복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 달라지고 싶다고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자존심 꺾는 연습을 해 왔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는 순간에도, 필요하다 생각되는 순간에도 머릿속 생각을 그대로 말하지 않았어요. 누가 봐도 상대방이 잘못한 일인데도 먼저 손 내밀고 사과했습니다. 상대가 빈정대고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하더라도 가능한 웃으며 대했습니다. 조이는 그게 쉽지 않은 일인데, 하기 싫은 일인데 어떻게 가능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사실 그런 순간마다 나도 그냥 화내고 짜증내고 싶었지... 정말 먼저 사과하고 싶지도 않고, 나도 한 성격 한다는 거,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 나를 마음속에서 죽여버렸어."


사람이 자신의 단점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고치기 어려운 까닭이, 그것마저 그 사람의 자연스러운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이 모여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는 건데, 단점만 똑 떼어 없앤다는 건 결국 자아정체성의 일부를 훼손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특정 순간에서 자연스레 드는 제 감정을 무시하고, 마음 속에선 화나 있는 나를 찍어누르면서 스스로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기분을 계속 경험했어요. 그런 기분으로 상대방 앞에 굽히는 연습을 했습니다. 때론 그만두고 싶고, 비참한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조이에게 설명할 때 스스로 '나를 죽여버렸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걸 보고,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나를 죽이는 과정에서 스스로 너무 많은 상처를 줬달까요. 날 함부로 대한 남 앞에서 스스로를 난도질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혼자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라도 타인에게 상처 주는 제 모습을 고치고 싶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또 앞으로 사랑하게 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고 나니까 마음에 굳은 살이 배긴 걸까요.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를 크게 다치게 하지 않고도 남을 받아주고, 져주고, 용서하는 일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먼저 손 내미는 일이 어렵지 않아졌어요. 물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조이에게 그걸 이렇게 설명했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하다 보니까, 예전 내 안 좋은 모습을 뜯어낸 자리에 결국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 있잖아. 화가 나도 남들에게 부드러운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게 아닌 걸 알지만 상대를 용서하고 먼저 사과하는 것으로 너그럽게 관계를 타이를 수 있는 사람. 단점이라 생각했던 모습이 뜯긴 자리에 그런 새 모습이 다시 채워지면서, 상처 났던 자아정체감이 다른 모습으로 다시 완성되는 것 같애. 스스로 원하던 좋은 모습이 되어가는 걸 보니까, 더 긍정적인 것 같고. 남들은 호구 같아 보인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타인을 부드럽게 포용하면서도 내 자존감이 다치지 않는 지금의 내가 더 좋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실천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