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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하 Feb 16. 2023

흉상나무의 연주

꿈을 꾸었다.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이곳에 왔다 갔다는 것을 꿈으로 보았다. 그래서 늪이 있으면 늪에 빠지고 돌무더기가 날아오면 그것에 뭉개져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검은 물속까지 갔을 때에 레몬빛에 자두빛 긴 눈동자를 가진 친구를 깨운 게 나이고, 그가 바로 저 친구라는 것도. 나는 다시 그 검은 물속에 잠겨야 한다는 것도. 이다음은 무얼 통과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지만 무서운 건 여전하다.


이명처럼 귀를 파고드는 바람소리에 찡그리며 눈을 떴다. 나는 흉상으로 다듬어져 있는 내 키 만한 나무들이 미로를 만들어 정갈하게 줄지어 서 있는 것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친구는 여기에 없다. 아마도 이 흉상나무들 끝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동굴로 함께 들어가야 할 테니.

이곳을 혼자 빠져나가야 한다. 한 흉상나무가 선창을 하면 흉상나무들이 각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곧 이명이 시작되고 어지럼증으로 인해 제대로 걷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두려움에 눈을 감지 말고 응시하여 반드시 찾아낼 거다.

꿈에서 본 이전의 나는 이곳에서 너무 괴로워했다. 공포스러워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 저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온몸을 칼로 베는 것처럼 느껴졌다. 왼쪽이마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쑤셔왔다. 꿈에서 봤다고 해서 별다른 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짜로 칼로 베어 피가 나는 게 아니라는 것과 흉상들은 흉상으로 다듬어져 있는 나무일뿐이라는 것이다.


‘뻬—————’

시작됐다! 재빠르게 까치발을 들고 사방을 살폈다. 어느 흉상이 먼저 소리를 내었는지 찾아야 한다. 나뭇잎을 부르르 떨며 지르는 녀석을 찾아야 한다. 곧이어 모두가 다 ‘끼-깨-’ 거리며 진동하고 온갖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어서 단번에 찾지 못했다.

그렇게 여러 번 소리가 먼저 나는 곳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이젠 다리가 풀려 더는 달리기 힘들어질 때즈음 한 나무의 뿌리에 걸려 고꾸라졌다. 오른쪽 턱이 쓸리고 무릎이며 발등, 손바닥, 팔꿈치까지 모두 빗금 이쳐졌다. 빗금사이로 피가 송글 맺히고 금세 방울방울이 하나가 되어 붉게 물들었다. 돌무더기에서는 피는 안 났는데.. 이젠 넘어지면 진짜로 피가 난다. 

한숨을 푹 쉬며 몸을 뒤집어 하늘을 바라보고 누웠다. 친구가 그립다. 친구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한테 하소연이라도 할 텐데.. 하던 찰나 또 선창을 하는 흉상나무.

‘끼예——————’

고개를 바로 돌리자 선창 하는 나무 아래에는 제일 먼저 이파리 몇이 흩어져 내린다.

‘아, 저거다!’

소리를 듣고 길이 나있는 곳으로 뛰는 건 너무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길이 아닌 곳으로, 나무와 나무사이를 헤집고 달렸다. 나무들이 견고하게 길을 내어주지 않으려 버텼지만 이미 여기저기 상처가 난 나는 더 상처가 난다 해도 상관없었다. 여기저기 할퀴어져 더 많은 피가 나더라도 괜찮다.

‘틔———————’

“잡았다!” 선창 하는 나무가 불고 뱉은 이파리. 이파리가 땅에 닿기 전에 손에 쥐었다. 그러자 일제히 모든 나무들이 소리를 내려다 말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길을 이리로 저리로 가로막고 미로를 그리고 있던 나무들이 바닥으로 스러졌다. 이제야 저 멀리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스러진 나무들을 밟으며 턱밑에 맺힌 피를 훔치며 걸어갔다. 바람은 가만히 불어 나에게 나지막이 한마디를 해주는 것 같았다.

‘거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 더는 아무것도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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