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25.07.24. 악몽

by 강주형

햇수로 치자면 총 4년을 알고 지낸 교수님이 있다. 다른 교수님들에 비해 친하냐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이 없긴 한데, 재학 중 들은 수업들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고 치자면 친한 게 맞아서, 다시 한 번 묻는다면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교수님과 어제 만났다.


최근 나의 거처는 학과 사무실. 몇 교수님들과 후배들은 여전히 내가 대학원에 간 줄로만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직 스무살일 때 호기롭게 대학원 입학을 위한 자소서를 써 놓은 사람 치고는 대학원과 얽힌 여러 사건들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아서 최근에는 대학원 생각을 아예 접어두고 있다. 게다가 어떤 교수님은 내게 완벽주의자는 대학원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으니까.


아무튼 공부를 하고 있는 건 맞는데, 여전히 고민은 많다. 오랜만에 일대일로 대면한 교수님은 교직이수 당시 국어교과 세 과목을 연달아 함께한 분으로, 교직을 함께한 선배들과 동기들이 교직 자체를 포기하고자 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바람에 주변엔 정보를 구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내게 실날같은 희망이 되어 주신 분이기도 하다. 뭐 여러 정보를 줬다기보다는 수업 자체에서 얻어가는 게 많았다고나 할까.


교수님은 그러니까,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학부생일 때만 해도 아주 거대하게만 보이던 교수님들이 최근에는 퍽 작아 보인다. 이 찌는 더위 아래에서 뭘 더 할 수 있었겠냐마는, 같이 일하는 조교 선생님께 빌려온 양산 아래서 이 더위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다. 오늘이 제일 덜 더운 날이래. 오늘로 날을 잡길 잘 했어. 내일부터는 더 더워진다고 해서. 주말에는 38도까지 올라간대요. 무슨 세상이 이렇게까지 더워질 수 있는지. 더위 조심하세요. 너도.


교수님께서 찾아온 식당은 너무 인기가 많아서 대기가 서른 몇 명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뒤로 세워놓은 계획이 무너지는 탓에 우리는 옆에 있는 중식당에 들어갔다. 교수님은 무슨 내 엄마라도 되는 마냥 밥을 먹이겠다고 했고, 나는 무슨 엄마라도 마주한 것마냥 밥을 먹었다. 처음으로 교수님께 내 본가에 대해 이야기했고, 교수님은 집에 자주 가지 못하면 엄마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보고 싶긴 한데, 그것보단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고 고되어서요. 교수님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내 말에 수긍했다.


그러고선 다시 걸어 영화관에 도착했는데, 영화관 안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는. 처음에는 인지도 없는 영화를 인지도 없는 배우들과 찍는 줄 알았는데, 자리를 잡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무리 봐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는 것이다. 서 있는 모양새를 보니 누가 봐도 문상훈이었는데, 당장이라도 팬이에요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다가 말았다. 그러니까, 일할 땐 건드는 거 아니니까.


'미세리코르디아'라는 영화를 봤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 교수님께서 '골때리는 영화가 한 편 있어서'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정말 골때리는 영화였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에 영화관이 점등되자 '정말 골때리는 영화네요.'했다. 그러니 교수님이 웃었다. 우리가 원하는 결말이 안 나는 게 이 영화의 묘미라고 하자. 영화를 보기 전에 훑었던 리뷰 중에 적나라한 남성의 나체가 등장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스포는 여기까지다.


영화관에서 나왔는데 너무 유명한 남자 배우가 바로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교수님 저 분 그 분 아니에요? 어, 내가 봐도 맞는 것 같다. 너무 유명 배우가 너무 제 눈앞에 있었던 게 아닌가요? 하니 교수님이 또 웃었다. 우리는 그대로 스타벅스로 향했고, 그래서 뭐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내 미래에 대한 이야기든, 글을 쓰고 싶었던 아주 어린 나에 대한 이야기든, 뭐 정말 이것저것.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못 쓰고 있다 하니 혼났다. 글을 시간을 내어 쓰는 게 아니라 아주 짧게든 계속 써야 하는 거라고.


교수님은 남자친구가 없느냐고도 물었다. 난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교수님이 당황하셨다. 그러니까, 연상은 어때? 너보다, 한 여섯 살이 많아. 교수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왜 자꾸 아들 분을 내놓으시는 거예요. 그 분께도 여자친구가 있을 수 있다니까요? 아니야! 내가 봤다니까! 내가 직접 봤어! 없는 게 맞아! 아무튼 전 연상이 좋긴 한데요. 그래서 내가 그때 내 남편한테 너 좀 잘 봐두라고 했고. 네? 교수님 제가 며느리감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또 와르르 웃고. 좋은 사람 있으면 알려드릴 텐데, 내 주변은 다 결혼을 해 버려서.


그날 저녁엔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이 글을 잘 쓰는 세상에서 글을 한 자도 쓸 수 없는 꿈을 꿨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작가가 되고,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영화가 한 편 있다고 했는데, 교수님은 그러면서 자신은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임용 공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글 쓴다. 아주 휘발되는 하루를 이렇게라도 남겨놓아볼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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