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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 Sep 22. 2022

감사

사회적 배려는 당연하지 않다

이따금 학교에서 '장애 이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특별 수업을 받을 때면, 장애인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배려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지하철에서 넓은 장애인석을 마련해 두고, 휠체어 사용자가 탑승했을 때만큼은 일반 승객들이 다른 자리에 앉게끔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문을 열려고 할 때 문이 닫히지 않게끔 잡아 주는 것 또한 이러한 사소한 배려다. 


그런데, 지난 20여년간 장애인으로 살면서 체감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려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며 실은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배려가 때로는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배려라는 이름 하에 소외라는 형태를 띠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배려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를, 그리고 또 다른 장애인 분들을 배려해 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입학 후 처음으로 화재대피훈련을 하는 날이었고, 정해진 시간이 되자마자 전교에 사이렌과 함께 탈출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는 워커라고 하는 보조기기와 휠체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 어떤 것을 사용하든 간에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과 함께 계단으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방송이 나오기 직전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곧 안내 방송이 나오면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 (화재대피 시 만남의 장소)으로 내려갔다 올 테니 안전하게 교실에 있으라고 하셨다. 진짜 화재가 아니니 괜찮다는 말도 함께였다. 그렇게,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교실에서 썰물이 빠지듯 우르르 아이들이 나갔고 나는 텅 빈 교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창문이 닫혀 있었던 탓에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아마 선생님께서 악의적으로 이런 조치를 취하시지는 않으셨을 테지만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업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까봐 그러신 것이겠지만) 이 상황은 전혀 나를 배려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이 상황이 훈련이 아닌 실제 화재였다면, 나는 계단을 이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이 나고 있는 실내에 남아 목숨을 감수해야 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일에 대해 어머니께서 이의를 제기하셨고, 그 다음 화재 훈련부터는 선생님들께서 나를 업고 계단을 통해 운동장으로 내려오셨다. 


단적인 예시를 들었지만, 가끔 사람들은 배제가 곧 배려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내가 참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지레짐작과 함께. 배려는 어디까지나 받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다. 모르겠으면 배려받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 주기 전에 '내가 이렇게 해줘도 될까?' 하고 먼저 물어보면 된다. 보통은 그러면 받는 사람이 고맙다든지, 괜찮다든지 둘 중 하나로 답할 것이다. 휠체어를 허락 없이 만지거나 냅다 미는 것도 마찬가지다. 휠체어는 휠체어 사용자 본인이 조작법을 제일 잘 알며, 본인이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는 것도 휠체어 사용자의 몫이다. 겉보기에 불편해 보인다고 해서 도움을 준답시고 말도 없이 휠체어를 밀어 버리는 것은 우리로 따지면 누군가가 내가 힘들어 보인다며 나를 잡아끌고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과 같다.


반면, 내가 먼저 부탁했을 때 선뜻 도와주시거나, 실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와도 되는지 먼저 물어보시고 도와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영국에 있는데, 여기는 내가 휠체어로 길을 가다가 둔턱 때문에 휠체어로 진입하기 어려울 때 초면에 모르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대부분 선뜻 도와주신다. 식료품점에 가서 장을 보던 중 원하는 재료가 너무 높이 있어 손에 닿지 않을 때, 점원이 아닌 일반 고객에게 부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당연히 있었다. 하루는 친구와 만나서 놀기 위해 시내로 나갔는데, 거의 모든 건물들이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계단을 여러 칸 올라가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구조였다. (참고로 꼭 여러 칸까지는 아니더라도 계단을 올라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구조는 대체 누가 생각해 낸 건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뭐하나.) 그런데 친구가 갑자기 만나기 한 시간 전에 못 온다고 하면서 발이 묶여 버렸다. 집에서 먼 시내인 데다 점심을 어떻게든 그 곳에서 해결해야 했던지라 난감해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행인 분들께서 나와 어머니가 낑낑대고 있는 걸 보시더니 선뜻 휠체어째로 계단을 올라 주셨다. 알고 보니 이분들도 같은 식당에 방문하려던 참이었는데, 식당에 무사히 입성한 뒤에도 계속해서 배려를 해 주셨다. 분명 그분들은 나와 어머니보다 먼저 식사를 다 마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셨다가 계단을 내려올 때도 똑같이 휠체어째로 들어서 옮겨 주셨다.


어디든지 장애인들이 살기에 완벽한 사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들은 당연한 것이 절대 아니다. 사실 앞선 식당 예시에서 그분들이 식사를 먼저 마치셨기에, 그냥 바로 식당을 나가셨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배려를 하신 것은 그분들의 선택이었고 (설령 우리가 먼저 부탁했다고 할지라도 그 부탁을 들어줄지를 결정하는 것 또한 그분들의 몫이다), 따라서 나는 항상 감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혼자서 해내기에는 조금 어려운, 사소한 부분들을 늘상 맞닥뜨리는 내가 단단히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회의 도움 덕이고, 이는 그 자체로 기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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