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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 Oct 05. 2022

자립심

이제는 혼자 해볼래

학창시절의 꽃은 단연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현장체험학습 내지는 수학여행이다. 교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 가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수학 여행이 역으로 골치 아플 때가 종종 있었으니, 바로 누구와 버스 옆자리에 앉을 것인지, 혹은 누구와 방을 함께 쓸 것인지를 정해야 할 때였다. 선생님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겪어 온 선생님들께서는 이런 교우관계 문제를 아이들의 자율에 맡기셨다. 나 역시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거나 방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내 옆자리는 지난 11년의 학창 시절 동안 (고3 때는 코로나의 여파로 모든 수학여행이 취소되었기에 예외로 한다) 늘 정해져 있었다. 바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내 옆을 지켜 주신, 항상 감사한 어머니.


익숙한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건 동시에 휠체어 때문에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당장 버스를 오르내리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수학여행 코스에 등산과 같은 야외활동이라도 있으면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지 않아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거기다 나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10대 내내 혼자서 샤워하거나 머리를 말리는 일을 버거워했다. 혼자 아무것도 잡지 않고 서는 게 어려운 데다, 물기가 있는 바닥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대참사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넘어질 때조차 무릎을 굽히기 어려워 온몸으로 바닥에 떨어지곤 했다.)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매일 내 등하굣길을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수학여행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도 늘 나와 2인 1조처럼 붙어다니셨다. 초등학교 때는 특수반 선생님께서 도와주시는 경우도 있었는데,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특수반이 없는 학교였기에 어머니께서 이 일을 도맡으셨다.


그러나 사춘기 학생들이 그렇듯, 나 역시도 내 옆자리에 어머니보다는 친구가 있기를 원했다. 때로는 어머니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이 어머니의 눈치를 보거나, 나를 그들 무리에 끼워 주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내 장애가 서글펐다. 내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면, 나도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었을까? 고1 수학여행 도중 조별로 자유롭게 저녁을 먹으러 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내가 휠체어에 타지 않았다면 같은 조 친구들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식당에서 원하던 곱창을 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 조에 어머니가 붙어다니셨기 때문에 아이들이 나에게 화를 내지 않은 건가?


이런 좌절과 일종의 죄책감은 내가 자립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어머니께서 직장을 구하시자, 그 이유는 곧 현실화되었다. 나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년 동안 시간을 보냈는데, 그 1년 간 꾸준히 했던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재활치료였다. 고등학교 시절 병원의 치료 스케줄과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맞지 않아 3년 내내 재활치료를 받지 못했는데, 졸업하고 나서야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 상태를 다시 복구하고자 병원에 다시 다니게 됐다. 다만, 이제는 혼자. 그 전까지는 늘 어머니께서 하교 후에 병원까지도 동행하셨기에 잘 몰랐는데, 혼자 병원에 다니게 되면서 홀로 장애인 콜택시 (장콜)를 부르는 법부터 시간 계산, 병원 안에서의 수납 절차 등등을 익히게 됐다. 확실히 누군가가 나를 먼저 챙겨 주지 않는 만큼,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치료에 늦을 수도 있는 나날이었다.


나의 한국에서의 홀로서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제주도에 거주했는데, 때문에 좋아하는 가수들의 공연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그 1년 동안 놀기만 한 건 아니지만, 최대한 독립적으로 문화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내가 지금까지도 좋아하고 있는 모 가수의 콘서트다. 단독 콘서트는 아니었고 해당 가수가 높은 최종 순위를 차지한 경연 프로그램의 전국투어 중 하나였는데, 제주에서는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다가 공연을 보러 천안까지 가게 됐다. 김포행 비행기를 타고, 공항철도와 KTX를 이용해 천안에 가서 다시 공연장까지 장콜을 타야 하는 (참고로 당일치기였다), 어쩌면 무모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공연을 가기 위해 미리 천안 장애인콜택시 이용자로 등록했고, 당일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PPT를 제작해서 동선을 외웠다. (당시 과외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내돈내산 공연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가족 없이 홀로 천안에 갔다 왔고,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했지만 스스로 길을 찾고 무사히 공연을 보고 돌아왔다는 뿌듯함이 컸다. 이를 시작으로 가끔씩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웬만하면 홀로 다니는 습관이 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홀로서기는 정작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 하게 됐다. 나는 현재 영국에서 유학 중인데, 말이 기숙사지 사실상 자취의 형태인 숙소에서 지낸다. 처음 영국에 입국할 때부터 혼자 들어왔고, 이제는 공부뿐만 아니라 설거지, 빨래, 청소 등의 집안일까지 어떻게든 혼자 해내고 있다. 사실 처음으로 들어와서 방 정리를 할 때만큼은 어머니만이라도 함께 와서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의견들이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매년 새 학년이 되어 짐 정리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힘들더라도 아예 처음부터 홀로 부딫혀서 노하우를 익히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같이 들어오셨다면 분명 손수 방 정리를 도와주셨을 것이 분명하고, 나는 몸은 편했겠지만 그 다음 해에 다시 들어왔을 때 엄청나게 고생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1인실에 거주하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나서서 움직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게 공부든, 집안일이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그마한 것들부터 스스로 하는 습관이 들었고, 부모님이 여전히 걱정하시기는 해도 끼니를 잘 챙겨 먹으며 살고 있다. 모든 자식이 언젠가는 부모의 품에서 나와 홀로서야 하는데, 예상보다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휠체어를 타고 자립하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아직까지 가끔 한국이 그리운 건 사실이다 (글 쓰는 날을 기준으로 영국 온 지 2주가 조금 더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 부모님이 더 이상 내 곁에 계실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주저앉지 않고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해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작은 욕심은 결국 때가 되었을 때 홀로서기라는 열매로 피어났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직 겪지 않은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내 주위의 모두가 힘들 것이라고 했던 자립을 기어코 이뤄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생각보다 더 강인해지고 단단해진 게 아닐까. 무엇보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하고 남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이에 개의치 않고 조금이라도 더 혼자 해 보려고 했던 마음가짐이야말로 장애가 나에게 가르쳐 준 가장 큰 교훈 중에 하나이다. 앞으로도 그 마음가짐이 변하지 않고 내가 타지에서 버틸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를 바라 본다. 마냥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게 좋았던 어린 내가 지금의 나를 봤을 때, 막연히 꿈꾸기만 하던 이상을 살아내 줘서 고맙다고 할 수 있을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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