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단상
그동안 막연히 내 연차(변호사 10년 차) 정도면 팀장 직급이 왠지 더 어울릴 것 같고 팀장이 되면 나의 업무적 능력과 숨겨진(!) 리더십을 더 잘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적재적소에 법카를 내밀 수 있는 여유로움이 마냥 부러웠었다.
그런데 얼마 전 대기업 계열사의 법무팀장을 맡고 있는 동기를 만났다.
나는 그의 명함에 적힌 팀장이라는 직급이 멋있어 보여서 연신 부럽다는 소리를 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그의 답은 팀장 직급의 고충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말도 마세요~~! 저는 팀장 안 했으면 좋겠어요. 위에서는 상사가 쪼고, 말도 안 되는(!) 일 시켜서 괴로운 데다가 밑의 직원들 눈치 보느라 적임자? 에게 일도 못 맡겨서 제가 야근하면서 처리한 적도 많아요! 저는 팀장 안할 수 있으면 안하고 싶어요! 책임만 있지 좋은 게 별로 없어요! 아랫사람에게 말할 때도 꼰대 소리 들을까봐 얼마나 걱정한다구요~”
그 말을 듣고보니 또 팀장이라는 직급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닌 것 같다.
(난 왜 이리 귀가 얇은 걸까?;;).
생각해보니 하나의 팀을 이끌어가는 팀장이라는 자리는 나름의 권력(!)이 주어지기도 하나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기는 할 것 같다.
특히나 법무쪽은 여러 사업부서 등에서 책임전가를 하기도 하고 무슨 문제만 터지고 법적으로 조금만 관련 있으면 여기 저기 보고도 많이 하러 가야 할 것 같고, 각종 회의에도 임원들에게 수시로 불려가기도 하니 참 여러 모로 피곤할 것 같기도 하다.
'결재권자'의 무게는 또 어떠한가?
여러 전자문서에 남아있는 실무자-책임자-관리자-최종결재권자 라인에서의 관리자 혹은 결재권자의 책임은 그저 보고용으로 아랫사람이 올린 기안을 가벼이 읽고 결재를 하였다고 하여 약화되지 않는 강력한 것이리라.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결재라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조사할텐데, 윗 사람일 수록 책임의 강도가 더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아랫사람들에게 혹시나 라떼 혹은 꼰대 소리를 들을까봐 농담도 가려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아야 하는 표현의 자유의 축소 역시 나름 외향적이고 말하는 것을 (가끔은) 즐기는 내 성향상 참기 힘든 팀장의 무게일 수 있다.
이런 저런 상황들을 떠올려보니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지금 나의 '팀원'이라는 위치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팀장 직급을 부러워 하는 것은 내 연차 정도면 이런 일을 해야 하고 이런 직급을 맡아야 한다는 사회적 기준을 옮겨온 나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남들보다 좀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을 늘 마음 속 한켠의 부담 내지 열등감으로 생각해온 소심함의 발현일 수도..
그렇지만, 밀라논나님도 그러시지 않았는가?
"시장에 나의 가치를 조금 할인해서 내놓는 것도 괜찮다"고..
강한 책임감이 요구되는 보다 높은 직급에 더 높은 급여수준, 직급에 걸맞는 법인카드나 차량 제공 등의 혜택에 익숙해지다 보면 언제든 직장을 떠날 수 있는 자유가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을테니 말이다.
시장 가치보다 할인된 가격으로도 누구보다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언제든지 직장을 떠날 수 있는 자유.
밀라논나님은 직장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예술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을 그렇게 잘 조화시키셨던 것 같다.
나 역시 내면에 흐르는 프리랜서? 혹은 작가 같은 예술인?을 향한 열망이 내재되어 있고 직장에 너무 얽매이기는 싫은 마음이 아직까지는 더 큰 편인 것 같다.
임원을 위해 나의 모든 삶을 회사에 바치는(그렇다고 임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삶은 도저히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의 평사원의 위치를 감사히 여기고,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배운 것을 남을 위해 내어줄 수 있으며
가끔은 이렇게 주절주절 겪은 일들과 생각들을 끼적이며
그렇게 평범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맘이 드는 밤이다.
(그래도 뭐, 조직의 수장?자리가 주어지는 좋은 기회가 온다면 리더 자리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기는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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