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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May 17. 2023

학력(?)

학력으로 무거워지는 마음

“학력”

  다른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떠나라”라는 말로 들린다.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학력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공부’, ‘시험’, ‘점수’.

  다시 물어봤다. 공부와 시험 점수는 왜 필요한지? 그 대답은 ‘대학-취업-좋은 직장’으로 이어진다. 

  학력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아이들이나 학부모, 교사들에게 학력이 많은 부분 ‘시험성적-대입’으로 연결되어짐을 본다.

  4.27. 강원도 교육청은 학력신장방안으로 수행평가를 축소하고, 2학기부터 중학교 2회 지필평가 실시와 및 지필고사 반영비율을 높이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서로 다른 학력의 정의와 생각의 협의나 함의, 공감없이 발표된 학력신장방안을 보며, 교사는, 아이들은, 학부모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오랜 인문계고 교직 생활 경험에서 본 것이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기가 가진 꿈에 대해 표현하기를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많이 봐왔다. 그리고 ‘학습하는 조직(책)’에 소개된 학생의 인터뷰 글인 “학교에서 우리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포기를 배운다.” 라는 말을 실감해 왔다.

  삶의 주체로서 아이 한 명 한 명 그들의 성취와 성장을 묻지 않고, 그들이 생각하는 배움과 평가를 묻지 않고 있다. 또, 아이를 세심하게 오래 관찰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찾지 않고, 어른의 조급한 관심과 사랑으로, 어른들이 이해하기 쉽고, 숫자로 가시화된 성장을 보기 위해 ‘시험-성적-평가’를 가지고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

  지필평가 확대와 더불어 진단평가, 학업성취도평가까지 시험의 횟수와 방법이 늘어난다. 교사는 출제와 고사운영, 평가결과 기록, 1회 고사에 3주 이상 민감한 상태에 놓인다. 아이들은 어떨까? 2학기 개학과 더불어 중간고사-기말고사-성취도 평가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긴장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그렇게 마지막 시험이 끝나면? 붙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풀어진다. 고삐풀린 학생들 지도에 교사들은… 언젠가 겪었던 익숙한 풍경이 그려진다. 

  중학생. 발달단계에 따라 좌충우돌, 변화무쌍, 질풍노도, 오죽하면 파충류의 뇌를 가진 세대, 북한이 쳐들어오지 못하는 세대라는 말이 통하는 세대라고 할까?

  이 시기 아이는 왜 그럴까? 그 모든 생각과 움직임은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과정 중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호기롭게 도전하고, 쓰러지고, 일어서며, 자신을 알아가는 시기. 그래서 다양한 표현과 내재된 소질과 흥미의 발현을 격려 받고, 지지 받아야 할, 심리적 안전지대가 필요한 시기인 것은 아닐까? 그 안전지대에서 마음껏 자신을 알아가는 경험이 쌓여갈 수 있도록 지원받아야 할 중요한 시기임은 틀림없다. 도전하고 성공과 실패를 하는 과정 속에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아이들.  중학교는 학력(성적, 평가, 입시)이라는 외줄타기로, 평가 결과로 낙인 받는 심리적 압박이나 두려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껏 본능대로 도전하고 경험할 수 있는 안전한 네트가 있어야 하는 곳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학력은 스스로 배움을 추구하고 탐색할 수 있는 욕구라고 생각한다. 학력과 진로지도가 강조되는 상황이지만 역설적으로 진짜 ‘학력’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적극적으로 진로탐색을 어렵게 하는 정책이 펼쳐지는건 아닐까 우려가 된다.

  중학교. 마음껏 도전하고, 경험하고, 쓰러지고, 일어서며 자신의 성향과 재능, 소질과 누적된 경험을 통한 삶의 힘을 통해 진로방향을 설정하고, 그 방향에 맞는 준비로서 학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어른들의 조급함으로 막고 빼앗고 있는건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강원도는 전체가 인구소멸위기에 직면하고 있고, 각 지자체마다 인구소멸을 막기 위해 골몰한다.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요즘은 유아교육부터)-중학교-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아이들은 학력이라는 지상과제를 ‘인서울’로 귀결시키는 모습을 본다. 즉, ‘떠나라~’ 지역에 남는 것은 ‘패배’임을 세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지역이든 그렇지 않은 곳에서 자란 청년이 용기내어 지역으로 돌아와서 정착하여 마주하게 되는 시선도 ‘떠나라’와 다름없음을 느낀다. 돌아오거나 들어온 청년들은 지역으로부터 ‘장하다~’라는 시선이 아닌 ‘그 능력으로 왜 여기에…’라는 시선을 받게 된다. 지역에 머물기 힘들게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아이들이 느끼는 학력=시험=공부=입시=인서울=직장. 다시 물어봤다. 성적을 잘 받아서 서울대에 갔다. 좋은 직장에도 들어갔다. 그럼 그 이후에 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하겠느냐, 대답은 ‘아니요.’였다. 즉, 아이들에게 지상최대 과제인 ‘학력’은 ‘지역을 떠나라’ 를 목표로 하는 수단이 된 셈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인구 소멸위기에 직접 타격을 받고 있는 곳으로, 청년이 돌아왔다는 것은 큰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것에 가깝다.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지역에서 머무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도전심과 용기는 언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발달 단계, 본능적으로 도전하고 용기를 내는 시기. 중학교 시절과 같은 지금의 소중한 시기. 그 시기에 자연스럽게 도전, 용기, 성취, 쓰디쓴 실패, 다시 일어섬 등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그 시기에 아이들이 해낼 수 있게 곁에 머물러 주면, 곁에 있어주는 어른이면 되지 않을까?

학력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진행되려는 정책에 너무 많은 감정 소모가 일어난다. 지필평가 횟수 증가는 교사들을 일시에 ‘문제풀이식 수업’으로 돌려 놓을 것으로 보인다. 학생과 학부모는 평가 결과에만 연연하며 학원으로, 보충수업으로, 야간수업에 목을 맬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자기를 알아갈 기회를 박탈당한 채 포기를 배우며, 자존감을 잃어가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성장기를 보낼 것이 눈에 훤하다. 외줄타기에 성공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보지 못 하고, 외줄타기에 실패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을 시기질투하는 분노사회, 갈등사회가 보인다. 외줄타기를 강조하는 교육의 결과는 곧 소멸하는 지역과 과밀되는 지역의 격차를 늘릴 뿐이다. 아이들은 외줄타기를 성공하든 실패하든 지역에 머물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점 심각해지는 사회문제를 풀기 위해 엉뚱한 방법과 갖가지 정책으로 수많은 자원이 낭비될 것이다

  중학교. 그냥 놔둬보면 안 될까? 불필요한 돈도 안 든다.

  다양한 선생님들의 교육 철학과 교육 방법이 표현되고, 그 다양함 속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삶을 선택하며 도전할 수 있도록… 교사에게 학력이라는 외줄타기 결과 책임을 묻지 말고, 교사와 어른(학부모, 지역사회 등)의 지지와 시선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안전한 네트를 만들어 뛰어놀 수 있도록 하라는 책임을 묻자.

  지역 소멸 위기. 

  큰 용기와 도전심이 자격조건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 성장과정 속 경험에서 얻게 된 자신감과 당당함을 가지고 지역에 머물 수 있도록 하자. ‘떠나라’를 마음 속에 새기게 되는 ‘시절’이 아닌, 그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절’을 아이들에게 선물하면 안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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