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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Jul 22. 2020

강단형(1972~2020.7.10)

호는 2혼, 이름은 강다녕.

안녕하세요, 저는 다녕님 딸입니다.

이전 글 이후 소식을 전하지 못해 많은 분들이 기다리시는 것 같아 하루 빨리 알려드리고 싶었으나,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도, 브래들리에게도 너무나 힘들어서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엄마 남편분 (브래들리 왓킨슨)께서 쓰신 글입니다.

6.13 마지막 여행이 된 만리포 여행


2020년 7월  10일 오전 11시  25분 아름다운 나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아내 단형의 글을 읽은 적이 있거나 그녀와 친구라는 것이겠지요. 저는 여러분에게 그녀에 대한 저의 생각과 추도의 뜻을 전하고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는이 일이 당신에게 매우 큰충격일거라 상상됩니다.하지만 그녀는 6월14일 쯤 배가 아프다고 불평했습니다.그래서 저는 아비프로펜 (진통제)2개를 줬습니다.그리고 나서 이틀후에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병원에 갔고 진통제를 처방받아서 먹었습니다. 약이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6월 19일에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몇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다음 월요일에 그녀는 예비 결과를 받았습니다. 췌장암일 가능성이 있었고 그녀는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야했습니다.


아내가 떠난 후 저는 여러분에게 무슨 말이라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주 내내 저의 생각과 감정을 적어보려 여러 번 노력을 하였으나 제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충분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아내의 이야기, 저의 심경에 관한 이야기에 부디 귀 기울여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의 삶은 그녀를 중심으로 맴돌았습니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늘 그랬습니다. 저는 매일 밤 그녀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고 그녀 생각을 하면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돌봐야 할 아이도 없었고 우리 서로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내는 정말 현명하고 재치 있으며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일에 대한 아이디어와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글을 쓰는 작가였고 멋진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옷을 만들기도 했지요. 그녀는 이 모든 재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항상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가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계발하는데 필요한 모든 공간과 자유로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가진 창의력의 원동력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중학교의 영어 철자법 맞추기 대회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그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그녀는 사회자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한국이 처음이었고 한국에 온지 불과 몇 달 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소개를 받았을 때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비단 그녀의 미모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에서 퍼져나오는 카리스마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녀도 저와 똑같은 느낌을 가졌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요.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녀는 슬픔과 비극 속에서도 유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아픔을 표현했고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건네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옷을 만들 때 정성을 다하듯 이야기를 엮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는 불행 속에서 유머를 찾는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잃은 비통함 속에서는 유머를 찾을 수가 없네요. 그녀의 죽음에서 어떻게 유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아내는 저에게 삶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가 슬퍼할 때는 제 손을 잡아주었고 바보 같은 농담에도 웃어주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해서는 키스를 해 주었고 삶에 지쳐있을 때는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려니 제가 느끼는 슬픔과 상실감은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으로 인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제 아내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늘 설레곤 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제 아내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녀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자신의 글을 읽어주던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하곤 했습니다. 저는 아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여러분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찍어 준 엄마와 브래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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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종종 엄마의 글에 등장했던 다녕님 딸 홍률입니다. 지난 글의 댓글에 엄마의 부고 소식을 알린 것은 제 남동생 홍성입니다. 사실 지금 글을 쓰는 것이 많이 힘들고 이 글을 완성하기 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기다리시는 것 같아 짧게나마, 부족한 실력으로 글 써봅니다.

   

엄마는 지난 7월 10일 11시 25분, 췌장암(말기)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벼운 위 경련으로 약을 먹다가 암 말기 선고를 받고, 결국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겨우 20여일이 걸렸네요. 지난 20여일. 저에게는 영겁의 시간과 같았고 앞으로 엄마가 없는 나날들이 또한 그렇겠지요.    


작년 겨울, 저의 강력한 권유로 엄마는 브런치를 시작했습니다. 엄마를 완전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브런치에 연재하는 글들을 통해 엄마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브런치를 쭉 보다보니 이렇게 많은 글들을 남기고 가 준 엄마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의식이 없는 엄마 옆에서 엄마의 브런치 글을 읽어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글 중에는 엄마의 엄마(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의 마음을 다룬 글도 있었는데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이미 나에게 모든 답을 알려주었구나.’     


저는 엄마랑 정말 친했어요. 하루에 한번 많으면 두 번, 세 번씩 전화를 해도 하고 싶은 말이 끝도 없이 많았고 아주 사소한 일상까지도 엄마와 이야기 했습니다. 저의 모든 생각과 철학, 고민을 엄마와 나눴습니다. 진지한 학업이야기부터 은밀한 연애 이야기까지요. 친구들은 그런 저를 보며 엄마와 그런 이야기까지 하냐며 자주 놀라곤 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엄마랑 하루 24시간을 붙어있게 되었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을 만큼 저는 엄마가 너무 좋았어요. 아마 엄마의 글을 많이 읽으셨던 분이라면 제가 엄마랑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아실 것입니다.    

네덜란드 반고흐 미술관 앞 잔디밭, 쥐가 돌아다녔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냥 누워서 쉬었어요.


엄마는 처음에 위경련인 줄 알고 2주간 약을 먹다가 호전이 없자 씨티를 찍어보았고, 그 결과 3차 병원으로 내원해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6월 23일, 3차병원에 내원하여 mri 및 조직검사가 완료되기까지 딱 일주일이 걸렸고, 그 날 저녁(6월 30일) 복강 내 출혈로 인해 중환자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배가 부풀어 오르는 엄마를 보며 병원에서는 출혈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며,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중환자실로 들어간 지 삼일 째 되던 날(7월 3일), 주치의 선생님은 상주보호자였던 저를 불러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24시간 저와 붙어 있다가 하루에 30분만 면회가 가능한 중환자실로 처음 들어갔을 때, 엄마가 많이 불안해하고 힘들어했다는 내용을 나중에서야 간호기록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엄마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너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다가오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아직도 저를 가장 괴롭게 합니다.   

 

6.26 씻지도 못하고 환자복을 입어도 너무 예쁘길래 사진 찍어 엄마한테 보여주며 "엄마, 너무 예쁜 거 아니야?" 했더니 엄마가 "헐.진짜네. 왜이렇게 예뻐?"라고 한 사진.


7월 10일 11시 25분, 저는 엄마의 몸이 차가워질 때 까지 엄마를 끌어안고 얼굴에 뽀뽀를 하며 울었습니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엄마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몸이 딱딱해지고 시반이 생겨도 엄마 냄새는 그대로였습니다. 지금도 코 끝에 병원냄새와 뒤섞인 엄마 냄새가 일렁이는 것 같네요.    

요즘 저는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입니다. 법륜스님 강의를 찾아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보기도 하고, 일찍 부모님을 여읜 다른 친구들을 수소문 해 조언을 얻어 보기도 하고요. 평소 제가 존경하던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 의지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모두들 잠든 밤이 되면 혼자 엄마의 사진이나 브런치 글을 찾아보며 목이 쉬도록 울다가 잠이 듭니다. 다음 날 다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무렇지 않게 시덥잖은 이야기를 해보기도 하고, 브래들리와 짧은 영어로 엄마에 대해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자주 만나던 친구, 동생, 언니들을 대신 만나 ‘엄마’가 아닌 ‘다녕’의 삶은 어땠는지 알아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상 위 엄마의 영정사진 옆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저는 모든 사실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고 그저 꿈 같습니다.      


한 때 저는 엄마와 10개월 간 한 몸이었고, 저의 모든 것은 엄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곧 ‘다녕’의 일부이며 ‘다녕’은 곧 저의 일부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엄마가 존재하지 않지만 제가 존재하는 한 엄마는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마음속에서,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요. 

    

부디 오래 오래 엄마를 기억해주세요.

저는 엄마를 품에 안고 엄마처럼, 엄마와 함께, 엄마보다 더 강하게 살아 나가겠습니다.

7.12 엄마는 엄마의 엄마 옆에 잠들었습니다. 엄마가 어릴 때 자주 놀던 동산이기도 한 곳. 

마지막으로..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엄마의 글들이 몇 편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다듬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7.16 산소를 만들고 직후부터 비가 많이 와 걱정을 안고 갔는데, 비가와서 그런지 벌써 잔디가 많이 자랐습니다. 열심히 살아가야지요. 엄마 몫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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