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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un 23. 2021

뽀뽀 한 번 못 해줘서 미안해요

스팸의 추억





나는 2002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오티, 예비 대학, 수강 신청, 개강 총회, 전공, 교양, 선배, 후배, 동기 등등등...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시작해야 해서 정신이 없던 날들. 겨울만큼이나 추운 3월에 새로 산 봄 옷을 입고, 눈썹도 그릴 줄 몰라 엄마가 동네 화장품 가게에서 사 준 메이크업 베이스에 립글로스만 바르고, 그래도 왠지 '아가씨'가 된 것 같은 착각에 혼자 설레던 새내기였다.


3월 중순 쯤이었나. 송정으로 갔던 동아리 엠티. 아직 덜 친해져 어색하던 동기와 선배들. 여중 여고를 졸업한 나로써는 더더 어색하던 남자 동기와 남자 선배들.


그런데 그 날 낮부터 선배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떠돌고 있었다.


"밥 위에 스팸~"


묘한 미소와 함께 이 말을 주고 받고들 했다.


'뭔 소리야? 나중에 밥 먹을 때 스팸 준다는 건가? 맛있겠다 스팸 ㅋㅋ'


스팸을 좋아하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말았던 것 같다.


족구와 짝피구. 신입생을 위한 환영 프로그램들과 쑥스러웠던 자기 소개. 역시나 아무 것도 모르겠으면서 히히덕거리며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던 밤. 좀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던 취한 새벽...같은 것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다음 날. 쓰린 속을 부여잡고 눈을 떠 보니, 벌써 몇몇 동기들과 선배들이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김치찌개 냄새 사이로 스팸 냄새도 났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는 술 기운이 모두 사라진 엠티 다음 날 아침이 늘 뻘쭘했다. 역시나 뻘쭘해하며 밥상 앞에 앉아서 밥을 퍼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밥 위에 스팸'이 올라 왔다.


스팸을 집고 있는 나무 젓가락. 젓가락을 잡고 있는 큰 손. 큰 손을 따라 주욱 올라간 시선에 잡힌 사람은 동아리 회장인  S선배였다. 순간 밥상 앞에 앉아 있던 스무 명 남짓의 시선이 동시에 내 밥과 얼굴로 쏠렸다.


'뭐지? 밥 위에 스팸? 뭐야? 무슨 엠티 이벤트 같은 건가? 아님 설마......?'


눈을 땡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 봤지만, 다들 쿡쿡 웃거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 아무도 내가 원하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무 부끄러웠던 나는 일단 그 순간을 모면하고 싶어서 아무말 없이 진짜 빨리 밥을 퍼 먹었다. 빨리 다 먹고 그나마 친한 선배한테 살짝 물어 봐야지라고 생각하며. 계속되던 쿡쿡거리는 웃음 소리와 내 빨개진 얼굴에서 느껴지던 열기. 부끄럽긴 했지만 그 때 S선배와 나와 스팸을 둘러싸고 있던 그 공기의 달달한 느낌이 기억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따뜻하고 예쁜 기억이다.


어수선한 파장 분위기에 궁금한 걸 묻지도 못하고 해산 시간이 되었다. '하단'쪽으로 가는 사람 없냐고 크게 말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옆을 보니, S선배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밥 위에 스팸' 생각에 빠져 나는 좀 멍했다. 몇 번이나 말한 끝에 겨우 내가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지, 선배는


"야 내가 '하단'쪽으로 가는 사람 없냐고 말한 게 지금 다섯 번째야."


하면서 씨익 웃었다. 그제서야 나는


"아~ 저희 집 하단인데요?!"

 

라고 했고.  


"B랑 나랑 지금 하단 가는데, 집으로 바로 가는 거면 너도 같이 타고 갈래?"


라며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 보니, S선배의 절친이면서 차가 있는 B선배가 벌써 시동을 걸고 앉아 있었다. B선배의 차 뒷자석에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았다. 나에게로 집중되던 묘한 분위기.


그 날이 내 첫 연애가 시작된 날이었다.


S선배는 동아리 친한 동기들에게 엠티 가기 전 술 자리에서  '1학년 중에 내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이번 엠티가 고백의 기회인 것 같다.'고 말했고, 어떤 여자 선배가 '너무 궁금하다'며 '밥 먹을 때 걔 밥 위에 스팸 놓으면 안되냐'고 했던 것이었다. 공공연한 고백이 부담스럽던  S선배는 동기들한테만 살짝 말하고 집에 가는 길에 데려다 주며 고백해야겠단 계획을 세웠는데, 짓궂은 여자 선배들이 '밥 위에 스팸'을 다 소문내 버린 것이었다. S선배는 어차피 모두가 다 알게된 거 내 관심이라도 끌어보자 싶어서 (내가 자기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 보여서 소문만 나고 망한 것 같아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밥 위에 스팸'을 시전했는데, 그걸 나만 몰랐던 것이다.


큰 관심은 없었지만, 과대표나 동아리대표가 으레 가지고 있던 '좀 나서는 느낌'이 전혀 없고 조용하지만 열심히 동아리를 이끌던 그 선배에 대해,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정도의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 선배를 남자로 관찰했다. 스물 네 살 예비역이었는데, 쌍꺼풀 없는 눈에 웃을 때 나오는 덧니가 귀엽고 선한 느낌이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너 원래 좀 눈치가 없니?"


라는 말로 시작된 선배의 갑작스런 고백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날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며 선배가 내민 큰 손을 잡았던 감촉이 기억 난다.


선배는 나와 꽤나 서정적인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비를 맞지 않고 캠퍼스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영화에서 봤는데 여자 친구가 생기면 해 주고 싶었다며 쪼그리고 앉아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 주기도 했다. 과제를 도와 주고 시험 족보를 내밀기도 했고, 엄마가 준 반지라며 좀 고전적인 느낌의 금 가락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 주기도 했다. 피천득의 '인연'같은 수필집에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을 보여주며 빌려줄까 묻기도 했고, 집 앞까지 데려다 주며 헤어질 땐 꼭 이마에 뽀뽀를 해 줬다.


집 근처 화장품 가게를 지나며


"선미도 좀만 있음 2학년 언니들처럼 막 화장하고 구두신고 그러겠지?"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니, 지금 이대로 예뻐. 근데 나중에 또 어떨지 궁금하기도 해."


뭘 상상하는 건지 선배의 눈이 반짝하며 씨익 웃는 입술 위로 덧니가 보였다. 이런 말을 주고 받으며 우리 집 앞까지 걸어갔던 날. 집에 도착하기 전 골목길에서 선배가 말했다.


"키스 해도 돼?"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될 만큼 그 때의 나는 어리디 어린 여자애일 뿐이었다. 손을 잡고 걷는 길 끝에 '키스'라는 게 있을 거라 상상을 못 했다. 왜 그랬을까? 마치 사랑하는 방식이 지구와는 다른 딴 별에서 온 외계인처럼 '키스'라는 게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이후 '키스'로 사랑을 완성하고픈 스물 네 살의 청년과 '키스'가 아직 두려운 스무 살의 외계 소녀는 '키스'를 사이에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선배는 간헐적으로 '키스'를 부탁(?) 했고, 나는 무서워서 '키스'를 거절(?)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선배는 키스를 부탁하기를 그만두었고, '아 그냥 이제 키스를 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뜬금없이 다 포기한 그에게


"선배, 우리 이제 키스 할까요?"


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이르렀다.


남들이 보기엔 공식적인 예쁜 커플이었던 우리는, '그놈에 키스' 때문에 조금씩 서먹해져 가고 있었다. 키스도 그랬지만, 그 때 나는 받은 사랑을 어떤 식으로 돌려줘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로부터 받은 구애와 사랑을 양 손에 어정쩡하게 들고서 그걸 내 가슴에 담지도 못하고 돌려 주지도 못한 채 떨어뜨릴까 두려워 한 발짝도 앞으로 가지 못하는 상태로 여름을 맞았다.


기말고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선배는 학교에서 맡게 된 일이 많아져서 지금처럼 나를 못 챙길지도 모르겠다며 이해해 달라는 말을 했다. 좀 어둡고 차가운 표정으로. 나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 연애를 일단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날, 봄에 그로부터 받았던 반지를 돌려 주었다. 무언가 다른 대답을 원하는 것 같은 그의 표정을 외면하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혼자 캠퍼스를 빠져 나왔다.


사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던 것처럼 헤어짐 또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시험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학교 앞 선배와 같이 가던 카페에 혼자 앉아서 청승맞게 울던 생각이 난다. 때마침 시작된 장마는 나의 우울을 고무해 주었다. 파스텔 노란색의 여리여리한 가디건에 하얗고 하늘하늘한 주름치마를 입고 구두를 또각거리며 캠퍼스를 내려가는 누가 봐도 '아가씨'같은 선배 언니를 보며, '나는 왜 이렇게 고등학생 같을까. 그래서 이렇게 다 망쳐버린 거겠지.'라는 답지 않은 자책을 하고, 집에 와서는 거울을 한참 보며 색이 있는 섀도며 립스틱을 이상하게 찍어 발라 보기도 했다.






노련하게 화장을 할 줄 아는 나이든 여자가 된 나는 이제 그때의  모든 것이 귀엽게만 느껴진다. 지금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어설픔과 순수가 뚝뚝 묻어나던, 예쁘기만 했던 스무 살.


연애 상담을 해 오는 제자에게

"야 키스 했어? 키스 안 했으면 안 사귄 거지~~!! 너 혼자 걔랑 사겼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라며 농담을 던지는, 뭘 해도 어설프지 않은 명백한 어른이 된 서른 아홉 살.


만약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인송즈의 리사처럼 솔직하고 두려움 없는 키스를 거리낌없이 해 줄 수 있을텐데. 닿을 수 없어서 아쉽고,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어른에 서툰 스무살의 여자애. 그애가, 자연스럽기만 해서 오히려 서글픈 서른 아홉 살 여자의 가지런한 일상을 예쁘게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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