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차를 구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집을 보러 다닐 수가 있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에는 이민자에게는 모기지도 주지 않았고 보증인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아서 집을 구할 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버나비라는 동네가 한인들이 많이 살고 교통도 편하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백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살고 싶어 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동양인들이 별로 살지 않는 노스 밴쿠버라는 곳에서 집을 알아보았다. 주위 사람들은 노스 밴쿠버에는 비가 많이 온다며 떨떠름해했다. 아버지는 "아니 거기에 비가 오면 그 아랫동네는 비 안 온다냐? 나참 우스워서."라고 비웃으셨지만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 동네에 부슬부슬 비가 내릴 때 다리 건너 동네에는 해가 쨍쨍할 때가 많았다.
당분간 월세로 살 집을 계약하러 갔을 때 나는 그 허름한 외관에 실망했었다. 외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앞마당 정원, 집에 붙어 있는 주차장, 빨간 지붕 이런 걸 기대했지만 그곳은 잿빛 삼나무 지붕의 낡은 타운하우스 단지였다. 주차장도 빈약한 지붕 하나만 있는 공동 주차장이었고 정원이라고는 단지 한가운데의 녹지가 다인 곳이었다. 캐나다 가면 좋은 데서 산다고 한껏 바람을 넣어 놓고는 기껏 이런 허름한 곳에 사는구나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나는 집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계약을 마친 후 아버지가 숙소로 돌아가게 지도 좀 봐라 했지만 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실망했지만 그럼 좀 제대로 된 집을 고르던가.
그런데 막상 이사를 하고 나니 실내는 외관보다 훨씬 양호했다. 화장실도 두 개였고 방도 나름 넓었으며 집 뒤에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개울이 흐르는 그런 곳이었다. 나중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한국 이민자들이 삼삼오오 들어오기 시작했고 단지 안을 걸어 다니면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이제 집을 정했으니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인맥이다. 아버지 나이 대의 사람들은 '아는 사람'을 통하면 뭔가 일이 술술 풀리는 줄 생각한다. 사실은 좀 떨어지는 물건을 갖다 팔고 서비스를 소홀히 해도 아는 사람이니까 아뭇소리 못하는 게 현실이었지만 아버지는 곧잘 '그거 아는 사람 통해서 하면 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혈연끼리도 호구 잡히면 탈탈 털리는 게 세상 이치인데 인사 좀 하고 밥 좀 같이 먹었다고 남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거라는 생각은 여간 순진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법이다. 안 되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다.
인맥을 만들려면 우선 다닐 교회를 정해야 했다. 이민사회에서 한인교회는 거의 모든 사회생활의 핵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무교이거나 심지어 불교였던 사람들도 이민을 오면 교회에 얼굴을 한두 번은 들이밀곤 했다. 동양의 이방인들이 꼴랑 백몇십 명 모이는 한인교회 장로 자리가 한인들 사이에서는 무슨 대단한 훈장인양 여겨졌다. 그뿐 아니라 한인회 같은 데는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매년 선거 때마다 비방을 하고 싸움박질들을 했다. 한인들이 서로 돕자고 만드는 모임에서는 심심하면 횡령 이야기가 나왔다. 캐나다까지 와서 방구석에서 여포 자리 차지하려고 서로 싸워대는 꼴이 같잖았지만 영어도 못하고 문화도 모르는 이민자들은 그게 싫으면 혼자 사는 수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쉽게 교회를 정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민자들은 항상 제일 괜찮은 교회가 어딜까 하고 한두 달 교회 쇼핑을 다닌다. 이 교회는 신도들이 너무 적다, 저 교회는 목사가 정치 얘기를 많이 한다, 그 교회는 보니까 장로들이 너무 드세더라... 교회를 등록하기 전에는 수십 가지의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우리 집은 어쩐 이유에선지 밴쿠버 한인연합교회란 곳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무렵 그 교회가 속해 있는 캐나다 연합교단이란 곳이 동성연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허용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마침 기존 교인들의 반발이 심한 시기였다. 담임 목사님은 덩치는 씨름선수 같았는데 이따금씩 설교할 때 감정이 격앙된 나머지 눈물을 종종 흘렸다. 목사가 저렇게 질질 짜도 괜찮을까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일단 교회를 정했으니 다른 데 알아보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우리가 다니던 교회는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신도들 보고 하나님한테 쩨쩨하게 천 원 이천 원 헌금하냐고 호통치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사의 위상이 비교도 안될 만큼 낮은 이곳이 낯설었지만, 이 역시 캐나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 교회에는 학생부도 있었는데, 많은 이민교회가 그렇듯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학생들을 위한 예배와 영어만 하는 2세들을 위한 예배가 따로 있었다. 어디나 그렇지만 1.5세와 2세들끼리는 서로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1.5세들은 2세들 보고 저 한국말도 똑바로 못하는 바나나들이라고 생각하고, 2세들은 저 무례하고 시끄러운 FOB (fresh off the boat - 다른 나라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 들이라고 혐오하는 게 다반사였다. 나는 교회 같은 데서 친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 곳은 암묵적으로 위선을 조장하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서 만나는 인간들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 일반 예배를 보았다. 교회에 가는 유일한 낙은 예배가 끝나면 고국 소식이 담긴 한인신문을 종류별로 집어오는 것이었다.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으니 그게 한국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밴쿠버 조선이나 일요신문 등등을 집어와서 부모님이 교회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차에서 신문을 읽었다. 우리는 7인승 미니밴을 타고 다녔지만 차가 무거우면 기름을 많이 먹는다고 의자 세 개를 떼서 집에다 놓고 다녔기 때문에 차 바닥에 신문을 펼쳐놓고 읽고는 했다. 가끔 예배 후에 사람들이 차가 없는데 집에 태워다 주시면 안될까요 하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의자를 떼어내서 휑한 차 안을 보여주면 다들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