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토론토로 떠나는 내게 어머니는 그곳에 가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래도 이만큼 사는 것은 다 기도 덕이라고 여겼다. 약장수가 파는 약을 먹고 아무런 효험이 없어도 "그 약 안 먹었음 큰일 났어" 하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이 든다. 기도생활을 게을리했다면 우리 가족은 병마와 사고와 범죄에 휘말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정말 그런지 실험은 해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주일이면 학교 근처의 한인교회에 몇 번 가곤 했다. 백발을 휘날리는 산속 도사 같은 원로 한인목사가 있는 곳이었다. 백발도사님답지 않게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런데 그곳은 캐나다 연합교단 소속이었고 근래에 동성애자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한 곳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교회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고 했고 나는 그런가 보다 하는 중이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도서관 건물을 나서는데 웬 한국사람과 서양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알리고 싶은 사람들인데 혹시 시간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사람은 나보다 몇 살 많은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나도 한국사람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자 그들은 매우 반기는 표정으로 마침 금요저녁예배가 조금 있으면 근처에서 시작이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한국사람은 친한 척을 하며 자기가 몇살 위 형이라며 반말을 했다. 나쁠 것 없지 않은가 하고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예배장소는 학교 건물 안의 한 강당이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 삼분의 일 정도는 나처럼 어딘가에서 어리버리하게 있다가 끌려온 눈치들이었다. 예배가 시작되자 곧 출구를 자원봉사자들이 막아섰다. 예배는 열렬한 찬송으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울부짖고 두 손을 높이 올리고 찬송을 하느라 얼굴마다 땀이 흘렀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굿을 할 때도 처음부터 무당이 중얼중얼하는 일은 없다. 실컷 소리 지르고 뛰놀다가 접신을 한다. 이쪽 세계의 루틴 같은 것이다. 목사는 선이 굵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사람이었다. 설교란 것은 원래 누가 하든 지루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고, 요점은
우리 모임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다. 다른 교회들은 다 세속화된 위선자들이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비만이다. 뚱뚱할 때까지 음식을 처먹는 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다.
아멘 아멘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호응하는 신도들 중에는 아무리 봐도 뚱뚱한 사람들이 몇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 하자 한국인 대학원생은 인상을 쓰며 반말로 아래층 커피샵으로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밀치고 도망갈 것이냐 아님 순순히 따라갈 것이냐를 잠시 고민했고 따라가서 말상대를 해 주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다. 당시의 나는 친구가 없고 시간은 많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설교를 들어서 알겠지만 사실 자기들이야말로 주님의 참된 교회이기 때문에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거길 그만두고 자기네들한테 오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주님의 총명한 제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네들은 좋은 사람들인 것 같지만 예수만 잘 믿는다면 어디를 다니건 무슨 상관인가요? 하고 물었고 그들은 다른 교회에서는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고 대답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나 같은 사람들을 잘못되게 그냥 내버려 두시진 않겠죠?" 하고 대답하자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자기들을 보낸 것이라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음.. 글쎄요 하나님이 저한테는 그런 대답을 주지 않으셨는데요." 하고 말을 돌리자 그들은 답답한 표정으로 계속 똑같은 말을 했고 나는 계속 똑같은 대답을 했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그들도 지친 기색이 보였다. 나보다는 바쁜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에 일어서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거부하면 나중에 갈 곳은 지옥뿐이라고 했다. "뭐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할 수 없지요." 하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학기 초에는 온갖 종교단체들이 토론토 대학 캠퍼스에서 포교활동을 했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일본이나 한국 사람들이 교내에서 장미꽃을 팔기도 했다. 그들은 통일교 신도들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학생 신문에 길에서 말을 걸고 어디 가서 예배를 보자고 그러던지 꽃을 팔던지 하는 사람들 중에는 외부에서 온 사이비들이 많으니 학생들은 각별히 주의하라는 기사도 있었다. 종교가 아편이라면 그들은 마약상 같은 사람들이었다. 굳이 사이비가 아니더라도 당시 한인 교회들의 전도방식은 무례하고 우격다짐인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를 점찍으면 그 사람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며 전도하는 걸 주님이 주신 임무라고 여겼고 그렇게 해서 교회에 누군가를 데려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타지에서 온 친구도 없는 가난한 대학생에게 금요일 저녁은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친구는 쉽게 생기지 않았고 남들은 그렇게 쉽게 하는 연애도 나에게는 어려웠다. 불타는 금요일이란 말은 잘 노는 사람들 이야기고, 나는 주로 기숙사 지하의 세탁실에서 빨래를 하고 공동공간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보냈다. 기숙사 누군가가 주는 맥주를 받아마시며 두런두런 잡담을 조금 나누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파티 소리를 들으며 내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주말에는 번화가로 괜히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맥도널드에서 제일 싼 애플파이나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돌아왔다. 어쩌다 오랜만에 한인타운에서 저녁으로 된장찌개라도 먹으려고 동서로 뻗어있는 블루어 스트리트를 걸어갈 때면 눈부신 붉은 석양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럴 때 내게 든든한 느낌을 주는 것은 주머니 안의 오 달러 짜리 지폐 몇 장밖에 없었다. 주위로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커플들이 팔짱을 껴고 지나갔다. 그럴 때면 내 속의 무언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영원히 혼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도를 열심히 하면 언젠가 이해심 많은 여자친구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나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나를 무조건 사랑하는 위대한 전능자가 있다는 주장은 마음을 편하게 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을 교회로 데려왔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던지 나중에는 좋은 날이 올 것이며 지금의 불안은 마귀의 꼬드김 때문이라는 목사들의 간단한 설명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여자친구를 달라는 기도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처럼 우스꽝스러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여럿 접하고 난 후였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같은 교회 아무개를 여자친구로 허락하셨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지만 그 여자에게는 하나님이 별다른 언질을 주지 않았다. 공부에 전혀 소질이 없는 어떤 사람은 의대에 가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도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의대에 가지 못했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객관과 주관의 차이를 가볍게 생각한다. 신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게 정말 신의 음성인지 단순한 착각인지 조현병의 증상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어떤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확신이 있는지와 그게 사실인지의 여부는 별 상관이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미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교회에서는 의심하는 자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의심하지 않고 사이비에 빠져서 인생을 조진 사람들에게는 침묵한다. 나는 세상은 항상 불확실하며 불변의 진리라는건 없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플라톤주의를 신봉하던 교수와 논쟁을 하기도 했다. 교수는 세상에는 절대선이 있으며 사람의 마음은 그 절대선을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주장이었고, 나는 도덕이란 실용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규범이며 세상에는 살인과 폭력을 본능적으로 아름답게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시대가 바뀌면 도덕의 기준도 바뀐다고 주장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세상의 모든 게 불확실하다면 그게 얼마나 서글픈 인생이겠냐고 했지만 나는 옳고 그름을 정할 때 내 기분에 따르지는 않는다. 신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겠느냐, 그러기에 나는 신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에게는 산타가 없는 세상은 그렇게 무서운 세상이 아니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