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우리 나이, 그러니까 4-50대들은 요새 20대들이 형편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할 줄 아는 게 없고 시건방지다는 게 그 이유다. 대한민국 역사상 제일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었던 X세대가 이제 늙어서 어린애들 버릇없다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다 우리 때 이야기다. 요새는 법이 잘 되어 있어서 미성년자 성매매도 엄하게 처벌받고 길거리에서 함부로 사람을 때리면 큰일이 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영포티들은 젠지 세대들한테 훈수를 둘 처지가 아닌데도 걸핏하면 "요새 애들 개판이야"를 입에 달고 산다.
우리가 젊었을 때도 부모 세대들은 우리들을 보고 혀를 찼다. "지금 육이오가 다시 나면 요새 애들은 아마 다 죽을 거야" 하면서 나약한 젊은이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노인네들도 마찬가지였다. 밥상머리에서 반찬이 이게 뭐냐고 젓가락으로 탁탁 치면서 타박하는 건 다 노인네들이었다. 전쟁 때 먹던 것에 비하면 진수성찬인데도 말이다. 이민 와서도 김치 없으면 밥도 못 먹는 아저씨들이 육이오는 어떻게 버텼던 것일까. 쌀은 없어도 김치는 흔했었나? 서울서 대구까지 걸어서 피난 갔다면서 마트에 가면 조금이라도 입구에서 가까운 주차장에 세우려고 신경전을 벌였다. 인간은 편해지면 계속 편한 것만 찾게 마련이다. 옛날에 아무리 반지원정대의 일원이었다 하더라도 시간 지나면 배 나오고 게을러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육이오가 다시 난다면 아무리 경력직이라 해도 다 같이 몰살당할 것이다.
이렇게 애들이 나약해진 건 요새 부모들이 자식들을 과잉보호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요새 부모들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 때도 못지않았다. 특히 딸은 절대 고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공주처럼 길러지다가 아주 좋은 곳에 시집가서 고상하게 살게 하는 게 딸 가진 부모들의 목표였다. 능력이 되면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귀하게 키워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한국인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내 주위의 사람들도 젊은이들은 진취적이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자기 자식들은 사교육 때려 부어서 의치한에 입학시키고 안도한다. "우선 안정적인 직장이 우선이니..." 진취니 모험이니 그런 건 남의 자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내 아이들은 별 탈 없이 평탄하게 안정적인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한국인의 유전자에 모험심이란 건 없다. 모험 잘못하다 모내기 시기 놓치면 그해는 굶어 죽어야 하니까.
웬만한 자녀들은 부모가 별 볼 일 없을 경우 그 사실을 꽤나 일찍 간파한다. 그럼 다른 데 가서 배우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 탓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사람이 부모에게 받는 영향은 30퍼센트 내외라 한다. 나머지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부모들도 사실 자기 좋으라고 자식을 낳은 거지 무조건 희생하려던 건 아니다. 부모도 결국에는 남이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산다. 내가 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옛날부터 잘 알던 사람들이고 인연을 끊을 정도로 싫어하진 않으니 같이 사는 것이다. 사실 효도 어쩌고 하는 놈들일수록 입만 살은 경우가 많다. 응급실에서 우리 어머니 살려내라고 진상 피우는 인간들일수록 명절에만 가끔 얼굴 비추던 자식들이다. 그리고 요새 세상에 효도해야 한다는 말처럼 쉰내 나는 말은 없다. 내가 낳아달라고 그래서 낳아준 것도 아닌데 왜? 본인들이 갖고 싶어서 만든 사람에게 이제 세상에 내놓은 보답을 하여라 하는 것처럼 우스운 건 없다. 사람이 진정한 성인이 되는 시기는 자신의 부모가 어떤 인간인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결정할 때이다. 마흔이나 오십이 넘어서 아버지 어머니 말씀에 휘둘리는 사람을 보면 사실 조금 모자라 보인다.
이것이 내가 십 대 시절부터 하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꽤나 논쟁을 많이 했었다. 학교에서 선배라고 어깨에 힘주는 꼰대들도 같잖아 보였다. 먼저 태어난 게 자랑인가? 형들이 까불면 버릇을 고쳐준다 어쩐다 할 때마다 아니 캐나다 경찰은 노나? 신고하면 되는 거 아냐? 하고 생각했다.
엠지들이 싹수없는 제일 큰 이유는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연장자를 봐도 먼저 인사를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을 시키면 "내가 그걸 왜 해요?" 하고 묻는다던지.
그런데 손아랫사람이 먼저 와서 인사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굳이 인사를 받아서 뭐 할 건가. 다시 말하지만 나이 더 먹은 게 자랑은 아니다. 나이가 쉰이든 서른이든 사회에서는 동등한 성인이다.
나도 첫 직장에 들어가서 상사를 보고 인사하지 않은 적도 많고 내 직무와 별로 상관없는 일을 시키면 "내가 이걸 왜 하죠?" 하는 질문을 여러 번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닌 거 같은데 갑자기 주는 이유가 뭐지 싶어서였다. 다행히 그들은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그럼 내일부터 안 나와도 돼"라고 말하는 대신에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천천히 설명하며 납득시켰다. 난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거였으니까. 그러면 아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반면에 한인교회 청년부를 다닐 때는 그렇지 않았다. 목사들은 청년이라면 응당 교회에 헌신해야 한다며 대가도 없이 사람들을 부려먹었고 택함받았다고 우쭐해서 열심히 하던 아이들은 지쳐갔다. 나에게도 이것저것 일을 시키려 했지만 난 "싫은데요" 한마디면 충분했다. 내가 싫다는데 뭐 어쩔 건가, 다른 교회 가라고 그럴 것도 아니고.
개인주의라는 측면에서만 볼 때 엠지 세대의 행동양식은 8-90년대 서구권 젊은이들의 사고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다. 나도 한국에서 유별나다 소리를 듣다가 이민 오고 난 후로 여기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고 느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게 있었다. 90년대 중반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막 자리 잡으려 하던 시대였다. 대학에서는 성소수자 파티가 매주 열렸고, 기숙사에서는 모든 종류의 차별은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그래도 인종에 기반한 농담이나 은근한 차별 같은 건 흔했다. PETA 나 그린피스 같은 환경/동물권 단체들도 대학 여기저기서 세력을 키우던 시기였다. 캠퍼스 안에서 가죽 신발을 신고 가던 학생의 발에 빨간 물감을 뿌리고 'Leather is murder!'를 외치는 단체 회원들도 가끔 보였다.
차별은 옳지 않다. 내가 태어나 보니 한국이었는데 나를 동양인이라고 차별하는 건 옳지 않다. 남에게 피해 준 것도 없는데 성소수자라고 차별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식을 하는 게 부도덕하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시는 동물권자인 Peter Singer의 이론이 한창 인기였고 많은 '의식 있는 젊은이' 들이 채식주의를 선언하던 시대였다. 어렵게 말할 거 없이. 인간이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면 왜 동물이 맛있는 것일까? 동물에게 이유 없는 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생명체에게 권리를 부여한다는 개념은 이해하기 어렵다. 권리란 건 서로 간의 약속이고 우리가 암소들과 약속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때의 정치적 올바름이란 그런 정도였다.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고, 정치적 올바름은 이제 개인이 자신의 성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포함한다. 좌파적 사고로는 능력에 따라 수입에 차등을 주는 meritocracy도 역시 부도덕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짓을 저지른다면 따돌림, 그러니까 캔슬당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간혹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남녀사이 능력의 차이는 존재한다느니, 생물학적 성별구분만이 옳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떼로 들고일어나서 다구리를 친다. 어느 시대나 주로 20대들이 그런 도덕적 의협심이 강하다. 북미 사람들도 이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캔슬당할까 봐 입 다물고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요새 사람들은 자기가 틀리다는 말을 듣는 걸 못 견뎌한다. 남의 평가에 예민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객관적 사실과 나의 기분과는 큰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고의 형벌은 따돌림당하고 비난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걸 애초에 상관없어한다면?
캔슬컬처는 이제 사그라드는 눈치다. 조용하던 보수층은 참다못해 트럼프를 등장시켰고, 그는 "너네가 떠들면 어쩔 건데?"하고 제멋대로 한다.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힘을 못 쓴다 예전의 룰대로 돌아가는 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때는 촘스키는 살아있는 양심 그 자체로 추앙받았다. 엡스타인의 섬에서 어린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촘스키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누차 말하지만 도덕이 어쩌고 떠드는 사람일수록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진짜 힘은 권력과 돈에서 나온다. 남이 나에게 당연히 뭘 해줘야 할 의무 같은 건 없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권이니 복지니 하는 것도 지적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일시적 유행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떠들어도 힘센 놈이 귀싸대기 올려붙이면 아뭇소리 못하는 게 세상 이치다. 지난 몇 년 동안 정치적 올바름의 위상은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앞으로는 위선은 줄어들겠지만 세상은 더 힘들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