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으로부터 발견하는 취향
낯선 것과의 접촉은 내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 무언가와의 새로운 만남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 또한 비슷하다. 여행이 만족스러웠든 그렇지 못했든지와 상관 없이 여행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새롭게 알게 되는 경험이 된다.
해외여행에서 메인 여행지가 아닌 근교 지역을 가장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일일투어이다. 물론 ‘효율적’으로 여행한다는 것이 참 감성 없어 보이지만, 장롱면허인 나는 언제나 운전 대신 안전을 택했다.
대부분의 일일투어는 단체버스나 봉고차, 그리고 가이드 아저씨와 수신기와 함께 한다. 역시나 효율성을 중시하는 한국인답게도 일일투어는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길목에도 최대한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최적의 루트로 구성되어 있고는 한다.
“몽생미셸 투어는 한국인만 가능한 투어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서울에서 대전, 대구 찍고, 부산 왕복 당일치기 여행하는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새벽 6시에 집합해서 아침 식사는 동이 트기도 전인 오전 7시에 휴게소 빵집에서 크로아상을 먹은 뒤, 노르망디 옹플뢰르와 에트르타 두 지역을 들러 몽생미셸 수도원 내부 투어까지 하고 저녁을 먹고 돌아오면 밤 12시가 넘는 장장 18시간의 투어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엑기스 여행'이다. 남들은 숙박을 하며 가는 지역을 하루만에 보려니 엑기스를 잘 뽑아 먹기 위한 여행지의 핵심부가 미리 추려져 있다. 물론 이 엑기스를 그대로 빨아 먹는 것도 매우 알차겠지만, 투어여행을 더욱 다채로운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서 살짝 변주를 줄 수 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바로 투어 중 자유시간에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식사하기>다.
아주 평범한 동네의 아주 평범한 가게에 가보고 싶었다. 왠지 네이버 블로그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새로운 현지 가게 같은 곳 말이다.
치즈로 유명한 노르망디 옹플뢰르에서 1시간 반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미 아침 일찍부터 에트르타의 해안 절벽을 거닐며 소금바람에 푹 절여진 탓에 더 이상 바닷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점심으로는 단체로 제공되는 바게트 샌드위치가 있었지만,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버스 히터 말고 포근한 카페 온기로 녹이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동네를 한 바퀴 돌고는 눈에 띈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어머...! 또 빵이야?!”
이쯤 되니 벌써 빵이 물린다고 하는 우리 이모였지만, 이 동네에서 한식 비슷한 음식점을 찾았다가는 아무것도 못 먹을 게 뻔했다.
“똑똑똑, Hello~"
조용한 내부, 생기발랄한 언니와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이 했다. 가게는 옆쪽에 초콜렛 상점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아저씨가 있는 걸 봐서는 왠지 가족이 운영하는 빵집 같았다.
이곳도 분명 성수기에는 사람들이 붐비는 인기 많은 가게였을 테지만, 이 날은 춥고 사람도 없었다. 우리를 이 가게로 이끈 것은 네이버 블로그도, 구글 리뷰도 아닌 오로지 정성스레 구워진 스콘과 크로아상, 그리고 벽에 붙은 브런치 메뉴 포스터였다.
"3 brunch set, please"
"Oh, today no brunch set"
에그머니나, 빵에 질린 이모를 위해 브런치 세트를 주문하려 했지만 이 날 가게는 브런치 메뉴를 하지 않는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스콘 3개와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또 한번의 변주. 매번 시키는 카페라떼 대신 이 날은 다른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다. 물론 나는 카페라떼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커피를 시키고 '카페라떼 시킬 걸'하는 생각이 들 게 뻔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_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p16
따뜻한 우유거품이 땡겼던 나는 생전 안 시키던 카푸치노를 시켰다. 노란 각설탕과 함께 투박한 커피잔에 담긴 카푸치노 한 잔이 나왔다. 작은 종지에 꾹 눌러담은 꾸덕한 버터와 산딸기잼, 그리고 전혀 느끼하지 않고 소박한 스콘을 보니 벽난로 옆에 앉아 매일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수다쟁이 프랑스 할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분명 이 가게의 스콘은 매우 투박하고 거칠었다. 커피도 특별할 것 없는 다방 커피였고 버터와 산딸기잼은 평범했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 가게가 이 날의 최고의 기억 두 가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일단 당연히 맛은 기본이었다. 투박한 스콘이었지만 내 입맛에 맞았고 유난히 쫀득했던 버터 그리고 담백한 산딸기잼의 조화가 좋았다. 버터향이 전혀 나지 않는 퍼석한 스콘은 혼자 있었더라면 굳이 먹지 않았을 것 같지만, 쫀득하고 고소한 버터와 싱그러운 산딸기잼과 함께였기에 투박함이 매력으로 재탄생했다.
두번째로는 우연 때문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에서 여유로이 스콘을 굽는 가게 주인 모녀의 모습이 덩달아 나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우연한 따뜻함이 스콘의 맛과 뒤섞여 이 카페의 기억에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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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9살 쯤 되니 먹어볼 만한 음식은 다 먹어봤고, 식당을 고를 때면 새로운 메뉴보다 아는 메뉴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고르게 된다. 새로움보다는 익숙한 것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평균 33살이 지나면 듣는 음악만 듣는다는 연구결과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이 나와도 귀찮아서 원래 쓰던 것을 쓰는 경향을 자물쇠 효과라고 하는데, 인턴 때 수술방에서 이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한 선생님이 '어머 저 요새 듣는 노래만 들었는데 34살이네요'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났다.
<취향의 발견> 57
'인간의 취향은 어떨까?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과거형 인간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자신의 취향을 개발하고 찾아가는 현재형 인간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문득 "나 이거 좋아했었네"하고 깨닫는 순간도 있지만, 삶을 다채로운 취향으로 채우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사실 나의 착각과 편견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이처럼 첫만남의 순간은 기억의 방향을 크게 뒤틀기도 한다. 소개팅보다 우연이 겹친 사랑에 더 애절한 서사가 부여되고, 새롭게 도전한 음식점이 나의 취향을 저격했을 때 이 음식점은 내가 발굴한 나만의 장소로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다.
익숙함을 깨뜨리는 선택은 언제나 어색함과 불편함이 동반된다. 하지만 이 경계를 넘어선 자는 새로운 세상의 행복을 배로 얻게 될 것이다. 취향에 첫만남의 순간의 특별함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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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목적지인 몽생미셸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몽생미셸 투어날 두 번째 최고의 장소를 만나게 된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