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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꾸꾸 May 29. 2023

우연히 갑자기, 마우리치오 카텔란

생각하게 만드는 전시회

우연히, 생각지도 못할 때 찾아오는 행운이 있다. 그렇게 시간이 많던 2월에는 연이은 티켓팅 실패에 무료전시회임에도 관람을 포기했던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회인데, 금요일 오후에 우연히 들어가 본 사이트에서 대뜸 지하철 티켓 사듯 예매에 성공해 버린 것이다.


갑작스레 얻게 된 평일 한낮의 자유시간에 친구와 향한 이태원 거리 카페에서 구경할 옷가게를 찾아보기 위해 핸드폰 지도를 켠 나는 우연히 리움미술관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우연히 리움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우리치오 카텔란전시 탭을 눌렀고, '매진' 사이에 고개를 내민 '예약가능'이라는 처음 보는 탭을 보자마자 소스라친 가슴을 쓸어내리고 곧장 탭을 클릭했다. 그리고 곧이어 문자로 날아온 모바일 티켓.


그렇게 나는 리움미술관으로 향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WE⟫

리움미술관

2023.01.23 ~ 2023.07.16



천진난만 장난꾸러기

놀랐지?


이탈리아 파도바 출생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예술계의 장난꾸러기라고 불린다.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노숙인 모형이 있다는 것을 분명 전시회 후기에서 보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처음 전시회장을 들어가며 '와 여기에 누가 누워서 자고 있네?'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 것을 보면 그의 관객 놀리기 성공률은 아마 100% 이지 않을까 싶다.

마치 어린 시절에 다들 한 번쯤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친구를 놀라게 하기 위해 문틈 뒤편에 숨죽인 채 기다려보았던 짜릿한 추억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소위 말하는 '뻥'이나 작은 장난에도 친구들이 놀라는 모습에 느꼈던 사소한 즐거움들이 강렬하고 유쾌했던 것은 감정의 파고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어린 시절의 특권이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단순히 '익살스러움'만으로 무장된 것은 아니다. 전시관 입구에서 벌렁 누워 있는 노숙자를 마주했을 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을 떠올려보자. 아마 대부분 의문과 당혹감이 먼저 느껴졌을 테다. 하지만 이내 노숙자가 사실은 모형이었음을 인지한 사람들은 묘한 다행감이 들며 인증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자. 만약 이 모형이 실제 사람이었다면 못 본 척 최대한 조용한 발걸음으로 쏜살같이 그 앞을 지나갔을 테다. 측은함과 불편함을 애써 숨기며 말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은 희극적인 껍데기에 숨겨진 잔인하고 냉소적인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마치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의 비극 버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자세히 보니
놀랐다.

오래 보니
섬뜩해졌다.

이 전시회가 그렇다.




귀여운 다람쥐였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죽어있네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의 마스코트는 바로 벽에 붙은 바나나인 작품 ⟪코미디언⟫이다. 나도 드디어 이 작고 소중한 바나나를 보게 되다니.


이 바나나가 1억 5천만 원이었다나? 심지어 테이프에 붙여 놓은 바나나는 2~3일에 한 번씩 신선한 바나나로 갈아 끼운다.


예술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이다.


이 바나나를 관람객이 떼어먹는 해프닝도 몇 번 있었는데, 의도가 어쨌든 간에 카텔란은 그런 관람객의 능동적인 참여도 반길 것 같다는 생각.







그런데 사실 바나나는 1초 만에 사진만 찍고 지나가 버리긴 했다. 거참 실하게 익었네라는 생각 정도?

그 대신에 나의 눈길을 끄는 다람쥐가 있었다.


"어머 뭐야 다람쥐잖아. 너무 귀엽다~!"하고 다가간 사람들은 이내 소스라친 표정을 지으며 움츠러들었다.

비디비도비디부, 1996 (머리집게핀과 크기 비교)


아래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다. 그런데 왠지 모자를 뒤집어쓴 모습이 어둡고 음침한 것 같아 다가가보면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란다.

고등학교 시절, 반지하였던 학교 자습실에서 공부하던 내가 떠올랐다. 하루는 너무나도 야자(야간자율학습)가 하기 싫어서 몰래 튀었다가 호랑이 선생님의 8시까지 조용히 돌아오라는 문자를 보고 되돌아갔던 기억. 해가 뉘엿뉘엿 지는 맑고 깨끗한 공기에 들뜬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자습실 책상에 냅다 엉덩이부터 눌러앉았던 기억. 그리고 수능 전날밤 차가운 공기를 뒤로 하고 자습실에서 걸어 나오며 이게 내 평생 마지막 야자고, 저녁시간에 밖을 거닐 자유를 얻었다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던 날이 떠올랐다.


완전한 K-고등학생으로 살았던 나로서는 29살이 된 지금에서야 인생 사는 것처럼 산다고 느끼지, 단지 불필요한 점수 경쟁으로 인해 수많은 자유와 행복, 경험이 제한되었던 고등학생 시절로는 미안하지만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다. 물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은 개인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젊은 청년들이 기이한 수준의 경쟁에 내던져진 것도 사실이다.


전시회를 보면서 별의별 인생의 별의별 구석진 곳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이렇게 카텔란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작은 엘리베이터가 문까지 열리면



여기 사람 발만 한 엘리베이터가 있다. 사람들이 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동영상을 찍고 있지 않았다면 여기 엘리베이터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을 테다.

이 전시회는 작품이 어디 숨어있는지 모른다는 게 함정이다. <WE>라는 전시회의 제목이 대변해 주듯, 작품과 아티스트, 관람객이 동등한 존재로서 마주하길 바랐던 마우리치오 덕분에 지지대 없는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게 작품인지 원래 건물 디자인인지 구석구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하는 것이 반전포인트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궁금해진다. 저 앞에서 기다리면 엘리베이터문이 느릿하게 번갈아 가며 열렸다 닫히는데 귀엽게 보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미니어처 가구 같기도 하면서,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엘리베이터는 전시장 안의 작은 친구들을 위한 거라고 한다. 카텔란 작품의 특징을 꼽아보자면 그의 작품들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묘하게 현실과 다르게 뒤틀린 지점을 통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이다.  난 여기에서 얼마 전에 읽은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인용하고 싶다.



가브리엘 오로즈코, <홈 런Home run>(1993)
이 작품은 텅 빈 전시장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창가에 오렌지를 설치한 작업이다. 관객들은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미술 작품 대신, 창문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원래 그런 듯 아닌 듯, 창가마다 무심하게 놓인 오렌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
창가에 오렌지가 놓이는 게 별 일 아닐 수 있지만, 모든 집 창가에 동시에 오렌지가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꽤 서늘한 느낌이 들 것 같다. 내가 잘 아는 익숙한 일상인데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고, 나만 빼고 모두 무언가 공모하는 것 같은 느낌도 소름 끼쳤을 것 같다. p47
.
두려움은 분명히 익숙한 것인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다르고 왠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주는 심리적인 혼란과 충격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고 잘못된 원인을 찾으려 하는 인지의 단계로 이어진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낯설고 껄끄럽다고 느끼는 이 '불안한 감정'을 통해 우리는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 _박보나 저


그리고 왠지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으로 유명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도 떠올랐다.

개인적 가치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의 변화를 일으킨다.


생각보다 많은 고정관념에 갇혀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적당한 관습과 규칙 덕분에 세상이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지루하고 한계 짓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이 고정관념이다. 얼마나 나 자신을 하나의 틀에 가둬두었는지 잠깐 떠올려보자.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나한테 이런 건 어울리지 않아.'


물론 정말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자는 것은 아니지만, 걸쳐보지도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도 분명히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러니 이 글은 읽은 그대, 오늘부터 나의 하루에 의외성 한 방울 떨어뜨려 보는 거자. 짧은 치마만 입던 그대, 길고 풍성한 치마 한번 입어봐라. 매일 습관처럼 마시던 아메리카노 말고 내일은 녹차라떼도 마셔보고, 멋쩍은 아침인사 대신 힘차고 밝은 미소 한번 지어보는 거다.


그렇게 나의 하루를 뒤틀어보자. 뒤틂에 뒤틂이 반복했을 때, 언젠가는 지루했던 일상에 새로운 단면이 툭 튀어나오며 당신의 삶은 더 풍성하고 풍요로워질 테니.




마음이 모여 작품이 된

오브제


이 작품은 9.11 테러의 희생자를 기리고 구조작업에 뛰어들었던 소방관에게 감사를 전하고, 도시의 회복을 염원하는 메시지를 가득 담은 래디메이드 작품이다. 카텔란이 우연히 시장에서 발견한 이 액자를 작품으로 삼았다.


마르셸 뒤샹이 변기를 작품으로 설치하며 예술 작품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을 시작으로 래디메이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 액자의 원작자는 누구일까?

작품 ⟪코미디언⟫도 마찬가지이다. 바나나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새 바나나로 교체하여 벽에 붙여 놓는데, 그렇다면 ⟪코미디언⟫의 '원작'은 무엇일까. 첫 번째 바나나인 걸까, 벽을 거쳐간 모든 바나나일지, 아니면 바나나를 벽에 붙이겠다는 그 '아이디어'만이 작품의 원작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벽에 붙은 바나나를 먹는 해프닝이 비난받을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아래는 5월에 광화문 교보문고 아트스페이스에 설치된 메모보드이다.

"당신의 인생에서 허물고 싶은 경계는 무엇인가요?"

단순한 질문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대답에는 그들의 인생이 농축되어 있을 테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대답이 다들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려움, 의지력, 쓸데없는 걱정, 무기력, 나에 대한 의심, 인생의 방향성. 우리 모두 허물고 싶은 경계가 있지만, 허물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못 할 때가 많다. 나의 한계를 지어버리는 것의 반복.

그냥 오늘부터 뭐가 되었든 이렇게 생각하기로, 우리 약속해 보자. "못 할 게 뭐 있어?"




Epilogue

누구나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현실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전시이면서도 작품 자체가 사실적이고 익살스러워 그런지 그냥 부담 없이 관람하기 좋은, 우리나라에 많아졌으면 하는 그런 전시회였다.

같은 공간의 동일한 작품을 보더라도, 관람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에 잠기고, 그 생각은 곧 각자의 삶과 연결된다. 이렇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전시회의 매력을 하나 더 발견했던 하루.


리움 미술관 자체가 한남동 언덕 위에 있어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이 꽤나 이색적이어서 그냥 산책하고 미술관 앞마당에 앉아있기도 좋은 유럽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피곤하고 배고파서 집에 얼른 가서 파스타 해먹을 생각에 후딱 보고 나왔었는데,, 글 쓰려고 전시회 후기글들을 다시 살펴보다 보니 놓친 작품들도 있고, 전시관 2층에 코메디언 라떼가 있는 것도 몰랐다. 다시 가서 커피도 마시고 느긋하고 여유 있게 사색할 시간을 갖고 싶어졌다. 한번 더 티켓팅 도전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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