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일기 | 나도 시간을 좀 멈추고 싶다
이번주는 내내 가슴 한 움큼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답답하고 꽉 막힌 기분, 다들 느껴봤을 테다. 나는 이런 기분이나 들 때면 궁금해한다. '나 지금,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윤꾸꾸 선생. 그래서 이환자 problem list가 뭡니까? Input은요? 그것이 maintenance volume 맞습니까?
이환자 지금 퇴원해도 됩니까? 퇴원해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늘 증상으로는 ,,, 특이소견 없습니다."
"특이소견이 없는 게 뭔가요?
기침이 없고! 가래가 없고! chest retraction이 없고 바이탈 호흡수가 몇이어서! 호흡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일은 그 종이 가져갈 겁니다. 환자의 모든 게 선생님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야 해요!
오늘 이환자는 세 번 네 번 보세요! 이환자 주치의는 선생님입니다."
이름하여 why 설국열차. 꼬리에 꼬리를 묻는 질문은 사람을 얼음구덩이로 내몰게 되는데, 얼음구덩이에 빠져버린 사람은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근데 문제는 얼음구덩이에 매일 빠지다 보니 온몸이 동창을 입어버렸다.
너무 잘하려고, 아니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하지 말자는 거다. 병원에서 일을 하면 아침마다 주치의를 맡은 환자들의 회진을 돌게 되는데, 요약하고 정리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한 명 한 명 더 깔끔하게, 더 정교하게를 외치며 정리에 정리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새 회진 시간은 다가오고, 나는 여전히 첫 번째 환자만 구석구석 파악하고 있을 뿐인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실 초보일수록 필요한 정보가 많아진다. 고수일수록 적은 정보만 손에 쥐어도 파생된 여러 정보의 고리들을 떠올릴 수 있단 말이지. 근데 난 아직 고수가 아니란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숨 막힌다.
꺄르르 웃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금방 웃음 짓게 되죠.
지난달에 주치의를 맡았던 쌍둥이 남자아이들이 있다. 처음에 입원했을 때만 해도 쌍둥이 둘 다 하루종일 잠만 자고 온몸에 힘이 빠져 앉아 있지도 못했었는데, 어느 날 병동 스테이션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선생님들~ 00이 걸어서 나왔어요~'
걷지 못하던 첫째가 걸어서 병동 스테이션으로 엄마 손을 잡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쌍둥이 둘 다 엄마 손을 잡고 병동 복도를 뛰어다닌다. 꺄르르 소리치면서 말이다. 땡그란 눈으로 날 쳐다보면서 아직도 낯을 가리긴 하지만, 어제는 드디어 나를 안아줬다.
"선생님 한 번만 안아줘 한번만~"
숨 막히는 하루 중에 복도 저 편에서 이 쌍둥이 아이들의 꺄르륵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내달린다.
또 한 명이 여자아이가 있다. 초등학생인데 정말 어여쁜 사슴 같은 아이다. 어떤 기저질환이 있어 반복되는 폐렴으로 입원한 이 아이는 처음 마주했을 때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로 휘저을 뿐 통 목소리를 들려주지를 않았었다. 처음엔 아파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건가 싶었었는데, 3일 차쯤에 할머니에게 귀여운 짜증을 내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아니야 할머니 그거, 아니야!"
아니 우리 사슴이 목소리가 이렇게 컸었어?
난 어린아이들은 뭐 다 천진난만하고 낯도 별로 안 가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어렸을 적 어른들에게 어색함을 느꼈을 때가 많았던 것이 생각났다. 너,, 내가 아직 낯설었나 보구나?
어느 날부터는 컨디션이 좀 회복됐는지 사슴 같은 눈을 깜빡이며 복도를 하루종일 산책하는 우리 사슴이를 볼 수 있었다.
'안녕 사슴아~ 산책 자주 하네!'
'흐히힣. 안녕하세요 선생님.'
'뭐 하고 있었어~?'
'친구가 병원을 궁금해해서 영상통화로 병원 구경시켜주고 있어요'
초등학생이 친구랑 전화를 하는 것도 신기한데, 영상통화를 하는 건 더 신기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나도 초등학교 5학년쯤부터 뻔질나게 친구들이랑 문자를 하고 전화를 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땐 슬라이드 폰이었는데. 새삼 이런 걸 세대차이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나도 다 지나온 시절임에도 새삼 몇 살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낯을 가리던 사슴이에게 하루는 용기를 내서 짱구스티커를 주려고 사슴이를 불러 세웠다.
"사슴아, 짱구 알아? 선생님이 짱구 스티커 줄게 골라봐~~"
"음 알기는 아는데 본 적은 없어요."
...아니 짱구를 본 적이 없다니.
"헉 그렇구나. 그럼 사슴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뭐야?"
"저는 산리오에 포차코 좋아해요"
...호차코? 아니 포츠코? 뭐라고?
그래도 사슴이는 밝은 표정으로 짱구 스티커 한 장을 골라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복도에서 마주친 사슴이가 수줍은 얼굴로 나를 불러 세우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선생님 저 그림 그렸어요."
짱구였다.
그리고 이 짱구는 지금 내 핸드폰 케이스가 되었다.
이번주에 소아과 병동이 이사를 하면서, 우리 전공의들의 당직실도 새 건물의 창문 있는 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직실 창밖으로 보이는 숲과 잠실타워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하늘을 즐길 새도 없이 워낙 바빴던 탓에 천장까지 높이 쌓인 간식박스들을 풀지도 못한 채 침대에서만 쪽잠을 잔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었다.
이 아름다운 당직실의 무드를 이렇게 망칠 순 없지 해서, 어제 코크로치랑 함께 8층에 있는 높다란 간식장 두 개를 끙차끙차 화물엘리베이터로 끌어내 옮겨 드디어 당직실의 산더미 같은 간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터키에서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막 돌아오자마자 당직을 선 쿼카가 청소의 대미를 장식했다. 내일부터 또 숨 가쁜 하루하루를 보낼 테지만, 이 작은 당직방에 옹기종기 모여들 우리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본다.
아.. 매번 글 쓸 때 2탄에서 이어진다고 해놓고 시간 없어서 2탄이 못 나오고 뚱딴지같은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