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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꾸꾸 Jan 29. 2024

멀리서 보면 꽃밭, 가까이서 보면 흙밭

그래도 꽃은 있다.


심장 초음파가 정상이에요

하루는 교수님께서 심장 초음파 이야기를 하시며 그랬다.

“여기는 큰 병원이니까 교과서에서만 보는 병이 흔하지 그래. 내가 이전에 작은 병원에 있을 때는 말이야 매일 같이 심장초음파를 보는데 전부 다 노말(normal, 정상)이었거든.

근데 전부 정상인 것만 보고 있으니까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데?“

워낙 입담이 재치 있는 교수님이셔서 그런지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근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까, 내가 초음파를 보고서 정상이라고 그러면 엄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어머 정상이래! 감사합니다!’하면서 말이야. “


의사는 문제인 증상을 발견하고 귀납적으로 원인을 찾아가며 결론적으로는 원인을 해결하여 불편한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주된 일인데, 매번 문제없는 검사결과만 확인하다 보면, 회의감이 들 것도 같았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반대로 생각해 보니, 아무 문제가 없으니 마음 놓아도 된다는 말이 병원에 온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정상 소견을 정상이라고 구분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능력이다.

나의 첫 근무는 신생아중환자실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아기들은 커다란 인큐베이터 안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미숙아들이었는데, 이 아기들이 괜찮은 건지 아무리 봐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숨도 빠르게 쉬고 얇은 피부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아래가 움푹움푹 들어가는 것이 뭔가 이상해 보였지만 정상 소견을 모르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 신생아실에 가서 만삭으로 태어난 아기들 10명씩 보고 오세요.”

근무한 지 3일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신생아실에 가서 만삭 아기들을 봤다.

‘아니, 신생아가 이렇게 컸었어?’

2kg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미숙아들만 보다가 만삭아들을 보니 생각보다 너무 커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정상을 자신 있게 정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정상도, 그렇지 않은 이상 소견도 확실히 알고 있어야 답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다.




멀리서 보면 꽃밭, 가까이서 보면 흙밭

그래도 꽃은 있다.


선천성 부정맥이 의심되어 검사를 하러 입원한 고등학생 남자아이였다. 검사가 추가되면서 퇴원예정일이 밀린다는 것을 알려주러 병실에 방문했는데, 이 아이는 오히려 하루 더 입원해 있으면 드라마를 볼 수 있다며 전혀 여의치 않아 하는 것이었다.

“얘가 슬의생을 그렇게 보고서는 의사가 되고 싶대요. 근데 거기 드라마에서 방에서 노닥거리는 게 좋아 보인대”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긴 붉은 눈시울과는 다르게 어머니께서 입만 열면 웃음이 빵빵 터졌다.

“에이, 아니에요. 얼마나 바쁜데. “

요즘 금요일, 일요일이 당직으로 빼곡한 스케줄을 받아 들고는 잔뜩 뿔이 나 있던 터였다.


그렇게 말하고서는 아침을 먹으러 빵과 커피를 사러 동기 언니와 병원 카페로 향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여유롭게 빵 먹으러 가고 있네.‘

생각해 보니 정신없이 바쁘거나 지루한 순간도 많지만, 하루 중 소소하게 신나는 순간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내가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것보다는 사소한 불만거리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나였다.


당직 때마다 핑큿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보며 감탄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감탄력을 잃고 무색무취의 회색인간으로 변해버린 것은 분명 ‘이쯤 되면 다 잘해야지 ‘라는 생각과 ’ 새로울 것 없는 환경에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고 나면 대부분은 감탄하는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사실상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배우지 못한 증거라 생각한다.
_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_에리히 프롬> p133



인생이 매일같이 흥분되는 새로운 일들로 가득할 수 없다. 때문에 하루에 추동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 장치는 환경의 변화가 될 수도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될 수도 있다.



Epilogue

요즘에 갑자기 너무너무 일을 하기 싫은 충동이 몰려올 때가 있다. 요즘 말로 이것은 노잼시기.

익숙해져 버린 환경에 지루함 조금, 새로운 연차가 되기 전에 모르는 것을 잔뜩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버거움 조금.

이번 달은 이 노잼시기 극복하기 project,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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