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는 영화가 많을까, 문을 여는 영화가 많을까. 문을 닫는 영화는 대체로 부정한 외부인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함이 많다. <어벤져스>에서 아이언맨은 치타우리의 침공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우주로 날아가 핵폭탄을 터트리며 로키가 연 차원문을 닫았다. 문을 여는 영화들은 부조리하거나 억압적인 현재에서 벗어나는 플롯이 많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은 위장된 인생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쇼에서 탈출한다.
두 가지 중 어떤 영화가 더 많은지 셀 수는 없다. 하지만 공통점은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들은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를 나눈다. 나눠진 내외부에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상반된 속성이 있고 주인공은 하나의 방향을 결정한 뒤 전력 질주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이하 <스즈메>)은 다르다. 영화는 문의 내부나 외부가 아니라 그사이의 공간. 그곳을 정의하는 단어조차 없는 문의 내/외부 사이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문을 열기 위해 닫고, 닫기 위해 여는 양방향성의 영화라는 걸 강조하듯 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본의 건국 설화, 신토 신앙을 바탕으로 한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했지만, 일본의 현대사에서 발생한 굵직한 재난 현장을 방문하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차용하며 강력한 현실성을 불어넣는다. 더불어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사건의 중심에 놓으며 문을 닫아야만 하는 당위성의 여정으로 관객을 먼저 초대한다.
<스즈메>의 세계에선 자연재해로 인한 급격한 인구이동이든, 사회의 변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인구소멸이든 사람들이 떠난 폐허에서 뒷문이 열린다. 폐허에서 열린 뒷문에서는 미미즈가 삐져나와 지진을 일으킨다. 의지도 의도도 없이 문자 그대로 재앙 자체인 미미즈가 빠져나올 뒷문이 열리는 걸 막기 위해 뒷문 앞에는 요석이 박혀있다. 또한 요석이 없는 뒷문을 찾아다니며 재앙을 예방하는 토지시들이 있다. 토지시들은 폐허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돌리며’ 뒷문을 잠근다.
이처럼 평범하게(?) 문을 닫는 영화로 출발한 <스즈메>는 중반이 지나면 문을 열기 위한 영화로 방향을 전환한다. 요석의 임무를 버리고 고양이로 변해 도망친 것처럼 보이던 다이진의 목적이 사실은 스즈메가 문을 찾도록 도와준 것으로 밝혀지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완전히 분리하는 건 다가올 재앙을 예방하는 땜질 처방에 불과할 뿐 이미 벌어진 재난의 피해를 치유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기 때문이다. 변화를 이끄는 건 ‘생에 대한 의지’와 ‘공감의 내면화’를 결핍한 두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된다.
스즈메는 쾌활하고 다정하며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생에 대한 의지는 옅다. 일본 대지진으로 엄마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탓에 인간의 생사는 운에 달려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 이모의 삶을 방해한다는 부채감도 크다. 미미즈를 막는 과정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지만 토지시로 활동해 온 소타가 놀랄 정도로 겁없이 뛰어들어 미미즈를 봉인한다. 소타를 따라 집을 떠났을 때도 이모인 타마키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묻지만, 이모의 질문을 얼버무린다. 지금이 그저 운으로 채워진 시간이고 타인에게 부담감만 주고 있으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도, 무엇을 하는지도 대답할 수 없다.
소타는 공감의 내면화에 실패한다. 토지시인 그는 언제나 재난의 최전선에서 머물지만, 외부자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즈메처럼 소타 또한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친한 친구에게도 자신의 또 다른 정체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과거의 소리를 듣고 뒷문을 잠글 수는 있지만 현재를 힘겹게 살아가는 생존자와 소통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어떻게 보면 토지시의 일이 단지 가업이라 하고 있다는 인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현재에 안착하지 못하는 두 주인공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키는 문닫기의 반복은 또 다른 재난으로 이어진다. 도쿄에서 뒷문이 열리고 지금껏 보지 못한 거대한 미미즈가 빠져나온다. 다이진에 의해 의자로 변했던 소타는 결국 요석이 되기로 결심하고 참사를 막아내지만 의식을 잃고 저세상에 갇혀버린다.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소타의 선택은 숭고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잃은 스즈메의 세상은 그렇게 다시 한번 붕괴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막다른 한쪽 골목에 다다른 영화는 지금까지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 미미즈의 공간이자 망자인 세상인 저세상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으로 말이다. 스즈메는 고향인 이와테현으로 향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난 폐허이자, 스즈메가 4살 때 엄마를 잃은 재난의 현장이다. 동시에 그곳은 어린 시절 스즈메가 무심코 열었던 뒷문이 존재하는 장소다.
그렇다면 <스즈메>는 궁극적으로 문닫기가 아닌 문열기에 방점을 찍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문의 개폐를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게 <스즈메>가 현시대에 필요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고 영화라는 단단한 근거가 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두번째로 뒷문을 찾은 스즈메는 결국 요석으로 변한 소타를 구하고, 소타와 힘을 합쳐 거대한 미미즈를 다시 한번 봉인한다. 그 사이에 미미즈를 봉인한 새로운 아이템을 찾은 것도 아니고 새로운 조력자와 만난 것도 아니다. 변화는 문을 닫기 위한 스즈메의 여정에서 이미 시작됐다.
스즈메는 생의 대한 의지를 상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자로 변한 소타와 함께 문단속을 하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굴러가는 귤을 지켜준 답례로 따뜻한 식사와 숙소를 제공한 동갑내기 치카. 고베까지 차를 태워주는 대신 아이 돌보기를 맡겼던 루미. 이들은 재난이나 사회변화로 발생한 폐허로 상실의 아픔을 공유했지만 치유의 과정에 진입한 사람들이었다. 치카와 루미는 엄마를 잃은 스즈메가 외로움을 잊을 수 있도록 연대했고, 이모를 힘들게 했다는 부채감을 탕감할 수 있도록 한 사람 몫의 일감을 줬다.
여행을 통해 결핍을 해소한 건 스즈메만이 아니었다. 소타도 문단속을 통해 결핍을 채운다. 단지 토지시로써 가업을 수행하고 재난현장을 떠나는 게 아니라 스즈메와 동행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생존자들이 가진 트라우마를 곁에서 지켜본다. 저주에 걸려 의자가 되거나 요석으로 변해 저세상에 홀로 남는 경험으로 실제 재난의 당사자가 된다. 과거의 기록과 흔적으로서의 재난이 아니라, 재난 이후로도 계속되는 생존자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된 거다.
스즈메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저세상에서 4살 때 길을 잃고 엄마를 찾던 자신을 만난다. 현재의 스즈메는 울고 있는 어린 스즈메에게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되어갈 거야”라는 당부와 함께 엄마가 생일에 만들어준, 그러나 한쪽 다리가 사라진 의자를 건네준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4살 스즈메에게 이렇게 답한다. “나는, 스즈메의 ,내일이야”라고. 문단속의 여정을 통한 연대로 생의 의지를 찾아 비로소 현재를 살게 된 스즈메는 미래를 말하고 과거를 구한다.
かけまくもかしこき日不見ひみずの神かみよ。
아뢰옵기에도 송구한 히미즈의 신이시여.
遠とおつ御祖みおやの産土うぶすなよ。
머나먼 선조의 고향 땅이여.
久ひさしく拝領はいりょうつかまつったこの山河やまかわ、
오랫동안 배령 받은 산과 하천을,
かしこみかしこみ、謹つつしんでお返かえし申もうす。
삼가 돌려드리옵나이다.
소타가 뒷문을 잠글 때 하는 기도의 전문이다. 송구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시작하는 기도문은 ‘돌려드리옵나이다’로 끝을 맺는다. 긴 여정을 끝내고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뒷문을 닫을 때 스즈메는 이 기도문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가 대신 택한 문장은 ‘다녀오겠습니다’이다.
돌려드린다는 것은 사건의 완결이자 과거와 현재의 단절이다. 하지만 다녀오겠다는 건 잠시 문을 닫고 외부로 나아가지만 다시 돌아와 문을 열겠다는 미래를 향한 기약이다. 수많은 재난에서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하고 싶던 말이자, 깊은 상처를 간직한 생존자들이 가장 듣고 싶은 그 말.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 평범하지만 애틋한 말을 듣고 싶은 모두를 위해 처절하게 열린 문을 닫아 애도하고, 간절하게 닫힌 문을 열어 위로를 전하는 귀하고 보기 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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