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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May 26. 2023

<인어공주> 진짜 빌런과 해묵은 오해들

The Little Mermaid, 2023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디즈니의 실사영화<인어공주>의 악당은 누구인가. 전 세계 사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르술라일까. 우르술라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다. 인간의 다리를 얻고 싶다는 에리얼의 소원을 들어준 죄밖에(?) 없기 때문이다. 3일째 일몰 전에 에릭과 키스를 하라는 조건도 상세히 설명했다. 계약의 정당성은 원작에서도 그대로 연출된다. 키스에 실패하고 에리얼이 우르술라에게 잡혀갔을 때 아틀란티카의 왕이자 에리얼의 아버지 트라이튼이 화가 나서 삼지창 공격을 하지만 계약의 효력이 발동되며 공격은 무효로 돌아간다.


물론 독소조항이 있었고 중간에 훼방을 놓긴 했지만 우르술라는 두 주인공과 심리적으로 대적하지는 않는다. <인어공주>에서 주인공들과 직접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인물은 우르술라가 아니라 그들의 각각의 아버지와 어머니다. 에리얼이 지상과 인간에 관심을 보일 때마다 트라이튼은 그녀를 꾸짖고 억압하며, 에리얼이 힘들게 모은 인간들의 물건을 파괴하기도 한다. 에릭의 어머니인 셀리나 여왕도 마찬가지다. 좁은 섬을 벗어나 세계와 교역하며 국력을 키우려는 왕자를 바다가 위험하다며 궁에 주저앉힌다.


영화 <인어공주>는 원작에서도 얼핏 드러났던 이 갈등이 더욱 도드라지고 바다와 육지로 확장되어 펼쳐진다. 같은 맥락에서 에리얼과 에릭이 마녀의 뜻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부/모와 품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선택과 증명의 과정이 작품을 해석하는 중요한 키워드로도 사용된다.



■ 에리얼에 대한 해묵은 오해


목소리를 뺏긴 에리얼을 에릭이 사랑하게 된 이유가 외모 덕분일까. 원작의 대사와 연출은 그런 인식이 해묵은 오해이자 편견임을 드러낸다. 에리얼에 의해 해변으로 옮겨진 에릭은 눈을 뜨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여인이 날 구해줬어요. 노래하고 있었죠.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였어요”


에릭이 에리얼을 처음 보게 되는 연출 역시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를 기억한다는 그의 말에 힘을 보탠다. 해변에 누워있는 왕자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반면 해를 등지게 된 에리얼의 얼굴은 어둡게 처리된다. 그리고 곧바로 강아지 맥스와 그림스비가 에릭을 찾으러 오기 때문에 에릭이 에리얼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할 틈도 없이 에리얼은 급하게 바다로 뛰어든다.


우르술라가 가지려는 것도 에리얼의 미모가 아니라 목소리다. 영화와 원작에 등장하는 것처럼 우르술라가 변신한 바네사는 빼어난 미모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바네사의 미모는 우르술라의 마법으로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에릭을 홀려 결혼 직전까지 가게 된 건 우르술라가 에리얼에게서 빼앗은, 그리고 마법으로는 절대 만들어 낼 수 없는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타고난 아름답고 유일무이한 목소리가 에리얼의 바로 정체성의 전부일까.


영화에서 우르술라는 3일 안에 키스해야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없게 하는 주문을 추가해 에리얼을 곤경에 빠뜨린다. 이 설정은 외모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됐다는 오래된 오해를 불식시키고, 오로지 ‘3일 안에 키스하기’라는 미션 성공을 위해 직진하는 원작의 목적론적 사랑을 넘어 에리얼이 가진 진짜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 뚜렷하게 드러나는 에리얼의 정체성


이를 위해 추가된 연출이 있다. 에릭이 에리얼에게 자신이 어렵게 모아온 신기한 물건들과 지도를 통해 세계의 모습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심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이 장면은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화 없이도 서로에게 빠져드는 순간을 포착한다.


더불어 원작이 갖고 있던 구시대적인 성역할의 한계를 돌파하기도 한다. 원작은 우르술라가 부르는 ‘불쌍한 영혼들(Poor unfortunate souls) ‘의 “남자들은 떠드는 걸 싫어해 / 수다쟁이 여자는 지겹대 / 입을 다물고 있는 숙녀를 좋아하지”라는 가사처럼 자기주장이나 의견이 확실한 여자 대신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여자가 되기를 은근히 강요한다.


그러나 영화 <인어공주>의 곡에서 해당 가사가 삭제되고 우르술라는 “인간 세계 같은 건 잊어버리고 네 아빠한테로 돌아가거라. 거기 영원히 갇혀서 살아봐”라는 말로 에리얼을 꼬신다. 에릭에 대한 사랑만큼 컸던 건 트라이튼이 지배하는 꽉 막힌 세상이기도 했다. 감옥 같은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에리얼은 보다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에릭과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해 본인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인어의 노래에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어서 바다에서 그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런 강력한 목소리는 잃을 수도 있으며 의도치 않게 타인에 의해 악용될 수도 있다. 에리얼은 두 차례 목소리를 잃는다.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심리적으로 한 번, 마녀와의 계약을 통해 육체적으로 한 번. 하지만 진심과 성격을 빼앗을 수는 없다. 목소리 없이도 에릭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우르술라가 가지려 했던 에리 얼의 목소리 또한 사실은 에리얼이 가진 정체성의 전부는 아니었던 거다.



■ 2023년에 수용하기 어려운 동화적 급전개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주인공들과 자립과 함께 제시된 또 다른 주제는 종을 넘어선 인어와 인간의 화합이다. 셀리나 여왕이 말한 것처럼 바다의 변덕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 또한 부지기수다. 바다의 왕에게 경배를 보내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듀공(혹은 물개)을 인어로 착각한 인간들이 작살을 던진다. 트라이튼왕이 인간에게 적대심을 갖는 이유는 에리얼의 어머니는 인간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족자원을 남획하고 바다를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것도 인간이다.


하지만 이처럼 오랜 갈등과 원한, 편견으로 인한 상처가 에리얼과 에릭의 결혼으로 단번에 봉합되고 만다. 인간과 인어가 바다에 모인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그 놈은 인간이야”라며 화를 내던 트리튼왕도, 에리얼의 마법이 풀려 다리가 지느러미로 변할 때 까무라치듯 놀라던 셀리나 여왕도 각자의 자녀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지 서로에게 보인 적대감이 적어졌다는 장면은 할애되지 않았다. 2023년에 받아들이기에는 무리수가 있는 동화적 급전개다.


마법 삼지창을 얻고 거대화 한 우르술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게 원작과 달리 에리얼로 바뀌었지만, 왕자의 도움이  필요없다는 메시지는 디즈니의 실사영화 시리즈의 주된 테마이자 이미 극 중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바 있다. 꽃노래도 한두 번이 듣기 좋듯, 귀에 박힌 돌림노래보다 인어와 인간의 합동작전으로 우르술라를 무찌르는 방식으로 화합의 계기를 마련해줬다면 인어공주가 2023년에 리메이크돼야 했을 명분이 더 탄탄해지지 않았을까.



■ 인어공주가 우리의 삶이 되는 방식


디즈니 영화가 그렇듯. <인어공주>도 폭죽이 터지는 디즈니성을 배경으로  'When You Wish Upon a Star'가 흐르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100주년을 기념 로고가 뜬다. 디즈니 경영진이 되어 100년간의 애니메이션 히트작 중에 단 한 편을 고르는 회의에 참여했다는 상상을 해본다. 침체기를 끝내고 다시 한번 디즈니 르네상스를 열고 디즈니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지금도 가장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인어공주>에 한 표를 던지지 않았을까.


<인어공주>는 정식 개봉 1989년에서 2년이 흐른 1991년에 국내에 처음으로 상영됐고 1년 지나서 VHS로 출시됐다. 5월 26일 현재 네이버 실 관람객 평점은 6.78이다. 유년기에 디즈니 프린세스에 열광하고 동일시했을 여성(7.85)보다 어째서 남성(5.31)이 더 낮은 평점을 주며 강한 실망감을 드러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을 두고 지난 몇 년간 벌어진 강력한 거부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영화에 대해 만족했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순간 캡처, 짧은 움짤로 젊은 배우에 대한 외모 비하에서 흑인들에 대한 인종 비하까지 번지는 논란을 보며 이를 잠재울 만큼 명작을 기대했지만 <인어공주>는 평범한 디즈니 실사영화처럼 안전한 노선을 택했다. 캐스팅이 파격적인 만큼 스토리도 치밀하고 파격적으로 진행됐다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지만 새로운 100주년을 준비하는 디즈니에 대한 의지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지 배우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다. 할리 베일리는 사랑스러움으로 커다란 스크린을 누볐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성능 좋은 스피커를 채웠다. 드레드를 한 흑인 인어공주가 생긴다해서 우리가 아는 빨간 머리의 백인 에리얼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술은 덮어쓰기가 아닌 탓이다. 1989년의 인어공주가 당시 차별받던 진저의 희망이었다면 2023의 인어공주는 흑인의, 앞으로 나올 인어공주 또한 누군가의 희망이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인어공주가 우리의 세상의 일부가 되는 방식이니까(Part of your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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