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lash, 2023
곱해서 ‘24’가 되는 식의 수를 구하라는 문제를 풀고 있는 어린 시절의 배리 앨런/플래시(애즈라 밀러). 배리는 24가 되는 식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게 답인지 모르겠다고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배리에게 ‘모든 것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며 파스타를 만들러 간다. 어린 배리와 엄마의 추억을 담은 짧은 플래시백에는 <플래시>를 관통하는 주제가 숨어있다.
2013년 <맨 오브 스틸>로 시작한 그간 DC 확장 유니버스(이하 DCEU)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같았다. <배트맨VS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처럼 답은 맞았지만 풀이가 틀려 실망을 안겨준 상황, <저스티스 리그>처럼 답도 틀리고 풀이도 틀려서 결국 다시 풀어야 했던 경우, <수어사이드 스쿼드>처럼 왜 나와야 했는지 모르게 출제 자체가 잘못되어 웃음거리로 전락한 일까지. DCEU의 오답 행진은 그 방법도 종류도 다양했다.
같은 기간 동안 최전성기를 누린 마블과 달리, 10년간 이어진 DCEU의 부진은 DC라는 브랜드 가치까지 나락으로 떨궜다.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으로 시작된 슈퍼 히어로의 종가라는 자존심,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으로 슈퍼 히어로의 가치를 다시 재확인시킨 저력,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로 증명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작품성까지 모조리 퇴색시킬 뻔한 외통수를 ‘정답이 없는 문제도 있다’고 인정하는 초강수로 돌파한 것이다.
과감한 결단을 내린 DCEU는 배리의 개인 서사로 접근한 <플래시>로 세계관의 리부트를 시도한다. 저스티스 리그의 일원으로 당당히 제몫을 하는 배리지만 부모님을 잃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크로노볼에서 스피드포스를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우연히 깨달은 배리는 결국 오래된 소원을 성취하려 한다. 엄마가 살해되는 순간을 바꾸고 아빠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순조롭게 과거로 돌아가던 배리는 갑자기 괴생명체의 공격을 받고 조드의 침공 시간으로 튕겨 나간다. 배리가 도착한 시간대에 공교롭게도 DCEU의 출발선인 <맨 오브 스틸>이 시작되던 순간이긴 했지만, 그토록 그리워한 엄마가 건강히 살아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 설정이 추가되며 <플래시>의 메타 영화적 성격이 강화된다. 바로 미래에서 온 올드 배리와 새로운 시간대에 살고 있는 영 배리의 존재다.
올드 배리는 경험과 지식은 있는데 사고로 인해 스피드포스를 잃게 된다. 반면 영 배리는 부모님도 잃지 않았고 스피드포스를 얻게 되지만 지식과 경험이 없다. 한 가지씩 결핍이 있는 두 배리는 완전하지 못한 우리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지구를 테라포밍하려는 조드의 침공이란 지구적 위기를 막기 위해 올드 배리는 영 배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초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에 신난 영 배리는 올드 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배리의 엄마가 살아있는 것처럼 역사가 바뀌어 버린 이 시간대에는 설상가상으로 올드 배리라고 알고 있는 메타 휴먼이 존재하지 않는다. 슈퍼맨은 실종됐고 원더우먼과 아쿠아맨은 없다. 천만다행으로 배트맨은 있었는데 벤 애플렉이 아니라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이다. 고담을 평화롭게 만들고 이미 은퇴한 키튼 배트맨의 도움으로 슈퍼맨 대신 지구로 온 슈퍼걸을 찾아내고, 올드 배리도 스피드포스를 되찾고 조드와 맞선다.
하지만 믿었던 슈퍼걸은 조드에게 목숨을 잃는다. 두 명의 플래시는 스피드포스를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 조드를 꺾을 방법을 찾지만 연이어 조드에게 패배한다. 슈퍼걸의 죽음이 절대 바꿀 수 없는 과거인 ‘필연적 교차점’인 것. 영 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시간여행을 하며 역사를 바꾸려 집착하지만 결국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의 망령이 되고, 급기야 수많은 시간선에 있는 다른 멀티버스들까지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필연적 교차점에서 좌절한 건 올드 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저스티스 리그를 거치며 성장한 그였기에, 역시 부모를 잃은 적 있는 두 배트맨의 조언을 떠올린다.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벤 애플렉의 조언, 여러 번 목숨을 구하려다가 실패했지만 ‘지금까지 네가 나를 구해왔다’는 키튼 유언은 올드 배리가 상처를 끌어안고 현재를 긍정하는 힘이 된다. 올드 배리는 블랙 플래시로 타락한 영 배리를 막아내고 무너진 다른 멀티버스들을 복구한다.
<플래시>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바꾸려다가 실패한 집착을 버리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DCEU의 깨달음을 담은 메타 영화 같기도 하다. DCEU를 떠나 엄마의 죽음마저 수용하는 배리의 숭고한 결정으로 끝났다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수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련은 쉽게 거둬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는 올드 배리의 작은 행동이 결국 미래를 바꿔버리고 DCEU는 멀티버스의 혼란으로 한많은 끝을 맺는다.
<플래시>는 과거의 인기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과거를 바꾸려는 주인공이 진짜 빌런이라는 점에서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과 유사하다. 그러나 <노웨이 홈>에서는 슈퍼히어로의 영웅성이 크게 와닿는다. 자신의 실수로 수많은 멀티버스에서 스파이더맨의 빌런들이 몰려오는 순간, 피터 파커는 사랑하는 연인과 친구들, 고난을 겪고 극복한 어벤져스 동료들까지. 그간 자신이 쌓아온 모든 관계를 포기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스파이더맨이라는 고독한 영웅으로 살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배리 앨런은 시간여행을 통해 조드의 침공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 중첩된 시간대로 인한 멀티버스의 붕괴라는 비극을 실제로 보았지만 다시 한번 과거를 바꾸는 악수를 둔다. 배리의 미련 때문에 변해버린 <플래시>의 미래처럼, 새로운 배트맨이 등장하는 장면은 오랜 시간 DC영화들을 사랑한 팬 서비스의 하나로 짧고 강렬한 웃음을 선사했지만 140분간 진행된 거울 치료는 끝내 슈퍼히어로 영화가 되지 못한 소동극으로 끝난다. 플래시가 다시 만회할 기회마저 사라진 이 지점이 DCEU가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교차점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