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의 바다는 이상하게 평화롭다. 거친 파도 한번 없이 잔잔한 바다에서 해녀들은 평화롭게 물질을 한다. 인근에 들어선 공장폐수의 유입으로 생태계가 파괴됐다고 하는데 물을 혼탁하게 만드는 부유물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하다. 바닥에 붙은 성게의 비늘 하나하나까지 구분될 정도다.
해녀들은 차가운 바닷물에서 저체온증을 막아줄 잠수복 없이 천으로 덧댄 남루한 복장을 했지만 어쩐지 먹고살기의 고단함보다는 레저로 스킨스쿠버나 다이빙을 즐기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맹룡호가 정박하는 물길의 배경에는 외딴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고급 요트가 자리 잡아도 어울릴 것처럼 근사한 자태를 뽐낸다.
거칠고 무자비한 바다에서 밀수품을 건져내는 장면은 기획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듯한 모습이다. 어쩌면 당연한 선택인 게<밀수>는 범죄자들의 치밀한 두뇌 싸움을 소재로 한 하이스트 액션영화가 아니라 수직과 수평의 대비를 통해 인간관계를 드러내는 드라마에 가깝기 때문이다.
<밀수>가 정의하는 수직과 수평의 의미는 권 상사(조인성)와 춘자(김혜수)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군천으로 새로운 루트를 뚫으려는 전국구 밀수 오야붕 권 상사는 춘자를 협박하며 우리 관계가 평등하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자 춘자는 수평으로 퍼져있는 게 아니라 수직으로 깊은 관계를 갖는 게 좋은 거 아니냐고 받아친다. <밀수>에서 수평은 뭉치지 못하고 퍼져있는 상태다.
남성 캐릭터들은 수평적이다. 어선이나 해양경찰선을 타고 수면 위에서 바다를 누비거나, 차를 타고 평평한 도로를 달려 군천으로 모여든다. 신분과 지위, 조직의 크기와 힘의 차이로 위계가 형성되고 억지로 구성된 상하관계지만 각자의 좌표평면에서 동일한 눈높이의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들이다. 수직적 움직임이 열 길 물속으로 빠지는 순간 이들이 몰살당하는 건 깊은 관계에서 필요한 호흡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 해녀들은 바다와 수면을 오가는 수직적 움직임에 능하다. 군천의 해녀들은 진숙의 결정에 따르지만, 때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 다른 길을 택하기도 한다. 자식, 가족과 같은 어떤 이의 배신을 겪어도 다시 생을 이어가고, 하찮게 보였던 아웃사이더의 저항과 분노의 표출이 가능했던 것도 위계가 아니라 신뢰와 우정으로 한 길 사람 속에서 호흡하는 훈련을 거친 덕분이다. 진숙과 춘자가 겪었던 위기 역시 오해로 인해 한 길 사람 속에 풍덩 빠질 수 없었던 맥락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밀수>의 해녀들이 깊은 잠수 끝에 터트리는 건 통쾌한 숨비소리는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맥질한 게 아니라 산소통을 매단 채 강사의 지도 아래 다이빙을 다녀온 것처럼 주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진숙과 춘자가 서로 수중과 수면을 오가며 나누는 하이파이브가 <밀수>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말없이 펼쳐지는 두 베테랑 해녀의 호흡을 보여줌과 동시에 친자매처럼 두 사람의 감정적 유대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춘자는 맹룡호의 밀수를 고발한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이다. 식모살이하던 14살 때에 자신을 겁탈하려던 주인을 찌르고 도망쳤다는 과거 때문에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했다고 고백하지만,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친자매 같은 진숙의 오해와 누명을 풀려는 노력은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권 상사의 협박과 의외의 도움이 없었다면 군천으로 다시 내려올 일도 없었을 것처럼 보인다.
밀수가 탄로 난 상황에서 사고로 가족들을 잃고 감옥에 다녀오고 배를 뺏겨 생활고를 겪는 진숙의 원한은 극 중에서 가장 깊고 어두워야 마땅하다. 치밀한 계획과 화려한 달변으로 사람을 구워삶는 춘자 같은 전략가는 아니라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우직한 운동가의 모습이라도 보였어야 했지만, 원흉인 춘자를 찾아 복수하려는 모습보다 장도리(박정민)의 치사한 처우에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순응한다.
오랜 세월 쌓아왔던 믿음만큼이나 처절한 화해의 과정을 지나야 할 두 사람의 관계는 온 힘을 다해 갈기는 뺨따구 두 번과 권 상사의 군천 진출이라는 우연을 통해 너무 간단하게 해소된다. 피비린내가 살벌하게 퍼지는 현장에서 춘자는 권 상사에 의해 안전한 방에서 보호받고, 진숙은 어판장 바닥에 널브러진 생선 내장처럼 썩은 채 고여있었을 뿐이다.
류승완 감독은 이미 2002년에 <피도 눈물도 없이>로 전도연과 이혜영이라는 여성 투톱을 주연으로 내세워 치열한 돈가방 쟁탈전을 벌였다. 양아치들이 돈과 착취를 일삼던 투견장을 배경으로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이 펼쳐지던 두 여성의 고군분투는 첫 번째 장편 상업영화가 가질 수밖에 없는 미숙함을 뚫고, 류승완 표 영화란 이런것이다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70년대를 수놓은 명곡들을 러닝타임 내내 깔아두고 한국 영화계를 이끄는 배우들로 스크린을 채운 뒤, 이제는 미숙함을 찾아보기 어려운 완급조절로 베테랑의 풍모를 자랑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거친 바다와 싸우고 가정을 책임지던 해녀의 진취적이고 강렬한 도상을 빌려와 그럴싸한 잠수복을 걸쳐봐야 잘 꾸며진 워터파크에서 내뱉는 얕은 호흡으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야 할 카타르시스까지 건져 올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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