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eless, 2023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배우 송중기는 <화란>의 시나리오를 읽고 생긴 선입견을 고백했다. 감독이 정말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낸 거 같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감독을 만나 자전적 이야기는 아님을 알고 안심했다고 한다. 2015년 <무뢰한>, <마돈나> 이후 8년 만에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된 김창훈 감독의 <화란>은 시나리오만으로도 모르는 사람의 동정심을 끌어낼 만큼 어둡고 답답한 세계를 그렸다.
18세의 고등학생 연규(홍사빈)은 새아버지의 딸인 여동생 하얀이 동급생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알고 그를 폭행한다. 합의금 300만 원이 필요한 상황인데 알바로 일하는 중국집 사장은 가불을 거절한다. 그렇다고 새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기는 싫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직의 중간보스 치건(송중기)이 연규에게 300만 원을 준다. 유일한 조건은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반협박뿐이다.
<화란>은 아주 투명하고 친절한 영화다. 영어 제목은 희망이 없다는 Hopeless. 한국 제목은 네덜란드를 부르는 옛 이름 화란(和蘭)에서 따왔다. 네덜란드는 새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주인공 연규가 명안시를 떠나 엄마와 함께 떠나고 싶어 하는 나라다. 국명 자체가 ‘낮은 땅’이라는 의미처럼 전 국토의 1/4가 간척지고 1/5은 해수면보다 낮다. 저수지로 둘러싸인 명안시와 비슷한 환경이다.
연규가 가고 싶은 곳이 네덜란드인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그저 어딘가에서 다들 비슷비슷하게 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치건(송중기)는 그런 데가 어디 있냐며 되묻는다. 하지만 그런 데는 치건이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들이 먹고 사는 명안시다. 치건에 말마따나 예나 지금이나 글러 먹은 동네 명안시는 하향평준화 되어 다들 비슷비슷하게 못 사는 동네다. 가난에 치이고 어른의 보살핌에서 방치되고 가정폭력에 노출된 연규와 치건도 물론이다.
오프닝은 명안시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운명을 함축적으로 그린다. 연규는 어쨌든 같은 집에 사는 여동생 하얀(김형서)을 괴롭히는 일진의 머리통을 돌덩이로 내려친다. 피가 묻은 돌덩이는 운동장에 고여있는 물웅덩이에 빠진다. 깨끗하고 새로운 물이 유입되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말라버릴 위태롭고 더러운 웅덩이에 덜컥 내버려진 피 묻은 돌덩이는 연규의 신세와 다르지 않다.
새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눈가에 크게 상처가 난 연규는 손님들이 항의한다며 중국집 배달원에서 잘리고 사채업을 하는 치건의 조직에 합류한다. 조직이 하는 또 다른 일은 동네의 오토바이를 훔쳐다가 도색을 새로해 되파는 일이다. 치건의 오른팔 승무(정재광)는 연규에게 묻는다. 우리가 뭐 하는 것 같냐고. 연규가 작업이라고 대답하자 도둑질이라고 정정한다. 이처럼 <화란>은 범죄에 대한 미화나 낭만을 덧입히지 않는다.
오토바이 한 대를 훔치려고 해도 할 일이 너무 많다. 수첩에 메모가 된 기존의 절도 날짜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현장에 설치된 CCTV는 확실하게 부숴야 한다. 사람만 보이면 시끄럽게 짖는 개도 진정시켜야 한다. 만능열쇠 같은 건 언감생심. 전선을 자르고 새로 이어서 수십번 페달을 밟아야 시동이 걸릴까 말까다. 도둑질의 통쾌함은 완전히 생략되고 피로감만 무한히 확장된다.
미화, 낭만, 통쾌함의 생략과 피로감의 확장은 연규의 가정환경으로도 이어진다. ‘살림이나 처지가 딱하고 어려움’이라는 의미의 “불우”에 이토록 딱 맞는 집구석도 없다. 사춘기의 피 다른 남매가 훤히 비치는 커튼 한 장으로 구역을 나눠서 한 방에서 생활하는 것부터 심상찮다.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변명은 지구상 어디서나 같다. 미안하다. 그땐 내가 많이 취했어. 앞으로 술 끊을게.
<화란>의 비현실적인 면은 누군가에게는 고작이라는 말이 나올 돈 300만 원으로 이야기가 시작된 게 아니다. 이상하게 수완이 좋은 치건의 비즈니스도 아니다. 믿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자세히 알아보는 건 더 내키지 않는 연규의 상황 역시 아니다. 반지하에 빼곡하게 들어찬 낡은 살림살이처럼 보는 이의 숨을 답답하게 만드는 절망들 사이에 연규가 엄마와 함께 떠나고 싶은 곳이 있다는 희망을 몰래 품고 있다는 점이다.
힘든 사람들이 늘 그렇듯 어렵게 간직한 희망이 사라지는 건 품고 온 순간의 1/10도 걸리지 않았다. 연규는 치건을 형처럼 따르지만 그처럼 냉정해지기는 쉽지 않다. 한쪽 발을 절면서도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오토바이로 배달일을 하는 완구를 만난 뒤부터는 연규의 착한 품성이 자꾸 그를 화란이 아닌 명안시로 잡아끈다. 완구는 300만 원이 7,000만 원으로 불어난 사채빚을 죽도록 갚지만 결국 생업 수단인 오토바이를 압류당한다.
연규는 치건 몰래 오토바이를 완구에게 돌려주지만, 그마저도 곧 들킨다. 연규를 찾아온 치건은 그러게 왜 주책을 떠냐고. 네가 오지랖 떨 팔자냐고 충고한다. 이 질문은 사실 영화가 관객에게 당신은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 묻는 것과 같다. 연규의 마음 씀씀이는 칭찬을 들어 마땅하고, 치건의 냉정함은 성토의 대상이다. 다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도의적 당위성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관객이 봐온 연규의 상황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영화의 주인공은 연규다. 하지만 ‘꿈같은 거 꾸지 말라’는 치건의 일침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무기력이 글러 먹은 동네 명안시의 설계도다. 연규가 눈가에 입은 상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아물지만, 치건의 찢어진 귀는 유독 그대로인 이유도 설명이 된다. 연규는 어쨌든 명안 시를 탈출해 화란으로 떠나려는 꿈이 있다. 숨만 붙어있다고 사는 게 아니라는 치건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의 세포는 재생되지 않는다.
<화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꿈의 주체성까지 나아간다. 알코올중독 아버지 때문에 죽을 뻔한 치건을 거둬 키운 큰형님 중범(김종수)은 재개발을 통해 한몫 크게 잡으려는 꿈이 있다. 최종 단계는 어린 시절부터 키운 유망주 정의석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거다. 조직폭력배의 뒷돈과 무자비한 지원을 받은 정의석은 국회의원 출마를 하루 앞두고 돌연 후보에서 사퇴한다. 큰형님의 분노는 아래로, 아래로 흘러 연규에게 피 묻은 웅덩이를 만들고 오라는 지시로 바뀐다.
오토바이는 명안시에서 생명의 상징처럼 보인다. 연규는 중국집 배달부로 일하며 화란으로 떠날 돈을 모았고, 혼자 어린 아들을 키우는 완구는 오토바이에 물건을 싣고 시장에 나르는 게 생업이다. 치건은 오토바이를 훔쳐 되파는데, 폐급이라고 판단되면 연료통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폐차시킨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완구는 오토바이를 뺏기며 절규하고 연규가 탄 오토바이는 연료가 떨어져 사거리에서 멈춘다. 치건은 송곳으로 자기 목에 구멍을 뚫고 목숨을 끊는다.
이처럼 꿈을 버리라는 이는 마치 스스로를 폐차하듯 생을 마감하고, 강제로 꿈을 주입받은 이는 사회적 자살을 택한다. 꿈의 윤곽선만 겨우 그리던 젊은이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를 겨우 구해 명안시를 뒤로한 채 떠난다. 자발적으로 꿈을 키울 기회를 박탈하고 지키지 못하는 사회에서 노욕만 남은 늙은이가 명안시에 똬리 뜬 채 남아있다. 피 묻은 돌덩이가 고여있는 웅덩이에 휑뎅그렁 남았던 오프닝을 다시 보니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과 닮았다. 너무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