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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Dec 21. 2023

<괴물> 치밀한 트릭으로 체험하는 폭력의 정의

Monster, 2023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80%는 각본으로 완성된다. <선셋 대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잃어버린 주말> 등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받고 미국 영화연구소(AFI)에서 평생공로상까지 수상한 명감독 빌리 와일더의 말이다. 이 말을 고레에가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괴물>은 각본만으로 평범한 작품을 넘어 명작의 기준을 80% 넘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제76회 칸 영화제(2023)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빛나는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가 쓴 <괴물>의 각본은 세 명의 등장인물 사오리(안도 사쿠라),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시선에 따라 하나의 사건을 다각도로 파헤친다. 얼핏 전설적인 일본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의 설정과도 맞물리며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느슨한 시선으로 관조하던 기존 작품과의 이질감이 도드라지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의 팬이라면 한번 맛봤던 고레에다의 맛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바로 <세 번째 살인>의 존재 덕분이다. <세 번째 살인>은 냉정한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의 단일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시게모리가 변호할 피의자가 살인자에서 종범으로, 종범에서 누명을 쓴 피해자를 거쳐 다시 살인자로 확정되는 동안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범행을 자백한 미스미(야쿠쇼 코지)의 진술이 번복되고 피해자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의 증언이 추가되어 그럴듯한 하나의 시각을 만들어내는 탓이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추가됨에 따라 진실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결국 아무것도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난다. 씨네21의 이주현 평론가는 ‘진실에 닿으려,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는 역설의 드라마’라는 평을 남겼다. <괴물> 또한 세 사람의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이전에 가졌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세 번째 살인>보다 나으면서도 고통스러운 것은 피의자나 증인의 말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실제로 겪은 일들이 함께 몰입하다 겪게 되는 낭패감이다.


■ 인간의 한계와 폭력의 정의


첫 번째로 보여지는 건 사오리의 시각이다. 그녀는 남편의 사후 혼자서 아들 미나토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어느 날 갑자기 미나토가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인가, 돼지일까’라는 질문을 한다. 이후 미나토는 어딘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신발을 한 짝만 신고 돌아오고 물통엔 흙이 가득 차 있다. 급기야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며 본인의 뇌가 돼지의 뇌라며 괴로워하는 미나토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 다그치자 호리 선생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화가 난 사오리는 학교를 찾아가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호리 선생의 징계를 요구하지만 선생들의 태도는 괴상할 정도로 기계적이다. 교장 이하 선생들은 영혼 없는 사과로 사건을 무마하려 하고, 당사자인 호리 선생은 면담 중에 사탕을 깨물어 먹고 혼자 피식 웃는 등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다가 오히려 미나토가 요리라는 학생을 괴롭히고 있다는 뜻밖의 주장을 펼친다.


두 번째는 호리선생의 시각이다. 이제 막 부임한 초보 선생 호리에게 미나토는 문제아다. 교실에서 갑자기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친구와는 주먹질하며 싸운다. 고양이를 죽인 거 같다는 제보를 듣기도 한다. 얌전한 학생인 요리의 실내화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고 화장실에 갇히는 등 학교폭력의 정황이 보이자 평소 폭력적인 미나토가 가해자일 것 같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나토의 어머니인 사오리가 학교로 찾아온다. 미나토에게 생긴 상처와 이상행동이 본인 때문이라며 해명을 요구한다. 교장과 동료 교사들이 사과하면 금방 누그러진다며 학교를 위해 희생하라고 압박하는 통에 제대로 된 해명도 못한 채 어영부영 퇴직까지 하게 된다. 이후 기자들이 찾아와 불법 촬영을 하고 폭력 교사라는 낙인을 찍고 여자 친구는 도망치듯 떠난다. 마지막으로 미나토의 시선으로 옮겨가고 요리와의 관계가 밝혀져서야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


제목부터 ‘괴물은 누구게’라는 아이들의 노래, 세 명의 시선을 넘나드는 플롯까지. <괴물>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치밀하게 설계됐다.  누군가는 악의적 속임수라는 찜찜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악의적 속임수라는 말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신과 같은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볼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표현하고자 함이 바로 <괴물>의 연출 목적이기 때문이다.


<괴물>은 누가 괴물인지 찾아내려는 추리극을 거부한다. 오히려 진실이 드러날수록 수수께끼를 풀어간다는 쾌감은 줄어들고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그 자리를 채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폭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미나토와, 사오리, 호리 선생에게 쏟아냈던 분노는 섬세해지려는 노력 대신 만족이란 태도를 거쳐 명백히 잘못된 과녁에 꽂혀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 행복의 조건과 빅크런치


영화에서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소리가 있다. 처음에는 사오리와 호리가 대립할 때의 불안한 배경음으로. 두 번째는 억울한 호리 선생이 학교 옥상에서 투신하려 할 때 귓가를 울리는 소음으로. 이 소리의 정체는 세 번째 가서야 밝혀진다. 학교에서 잘린 호리가 화를 참지 못하고 학교로 찾아온 날, 미나토와 교장이 음악실에서 만난다. 미나토는 자신의 감정을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어 호리 선생에게 학대당했다는 거짓말을 했다고 교장에게 털어놓는다.


교장은 결국 미나토와 요리의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호리 선생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트롬본을 크게 분다. 트롬본을 불기 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털어놔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 것 같다는 미나토에게 교장은 중요한 말을 남긴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으며,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사오리와 호리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제약한다. 미나토의 아빠는 다른 여자와 몰래 온천에 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아빠의 좋은 이야기만 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미나토의 모습을 보는 게 행복이라고 한다. 호리 선생의 취미는 책에서 오탈자를 찾아내 출판사에 알리는 것이다. 책을 쌓아두고 읽지만 타인의 생각을 통해 자신을 넓혀가기보다 결점만 찾아낸다.


부모와 선생 모두 미나토가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걸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어떤 조건을 충족하거나 혹은 모른 척 덮어버리고, 실수를 하지 않아야만 완전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기어코 조건을 붙이고 제약을 걸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어떤으로 축소해 버린다. 악의는 없지만 한껏 작아져 버린 그들의 세상에 미나토가 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시무시한 태풍이 상륙하는 날. 미나토는 집을 떠나 요리와 함께 자신들의 비밀기지로 향한다.


개울을 건너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선로를 따라 달려야 하지만 궤도를 이탈한 채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폐기차 한 칸이 그들의 아지트다. 미나토와 요리는 거기서 크레파스로 달을 그리고 색종이를 접고 잘라서 수많은 별을 만들어 걸고 빅크런치를 기다린다. 팽창하던 우주가 갑자기 수축하여 소고기덮밥이 소로 돌아가고, 똥은 엉덩이로, 인간은 원숭이가 되어 우주가 생기기 전으로 돌아가는 순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늘어나고, 사회라는 이름으로 관계가 확장되며 생긴 모든 질서와 규칙들이 무너지고 우주가 탄생하던 순간의 단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는 사건. 이때 하나의 점은 절대 대체되지 않을 자신의 본질일 것이다. 방송에서 경고하는 산사태를 예상하는 굉음이 시작되지만 두 사람은 그들의 우주 안에 서로를 응시한다. 두 사람의 두려움 없이 맑은 눈동자에는 우주의 시작이 된 하나의 아름다운 점이 이미 들어있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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