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lot, 2024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후 3대 항공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할 만큼 최고의 비행 실력을 갖춘 스타 파일럿. 뜨거운 인기로 유명 TV쇼에 출연하며 수많은 광고를 찍고 강연을 다니는 인플루언서 한정우(조정석). 상무와 함께한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순간의 잘못으로 모든 것을 잃고 실직하게 된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를 받아줄 항공사는 없고 은행이자, 양육비를 보내야하는 한정우는 여동생의 신분으로 변신해 여성 파일럿 한정미로 재취업에 성공하게 되는데…
1982년 개봉한 영화 <투씨>는 우연한 계기로 여장남자가 된 마이클(더스틴 호프만)의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 영화로 <파일럿>의 오래된 선배 격이다. 영국의 평론가 주디스 윌리엄스는 이 영화를 통해 겨우 며칠 동안 사회적 타자의 입장에 처해보고 그들의 곤경을 완벽히 이해하고 동조하는 것을 선언하는 행동을 혹평하며 ‘투씨 신드롬’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파일럿>은 투씨 신드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사실은 투씨 신드롬이라고 부르기도 자격이 애매하다.
<파일럿>에서 한정미(=한정우)가 겪는 차별은 ‘여장’에서 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자기와의 비행이 첫 경험이냐 등 분명한 성희롱 메시지를 날리는 후배이자 기장인 서현석(신승호)의 플러팅. 싫다는 데도 같이 놀자며 클럽에서 다짜고짜 손목부터 낚아채고 끌고 가려는 남자와의 실랑이. 밤이 되면 덥수룩하게 올라오는 수염과 남성의 생리현상을 막아내기 위해 생식기에 테이프를 붙이는 일명 ‘공사’를 해야 하는 상황들이 한정우가 아닌 한정미의 삶에서 닥치는 위협들이다.
한정미의 커리어는 실제 여성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 임신이야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고 이혼당해서 양육권을 빼앗겨 타의에 의해 육아에서도 멀어진다. 면접에서 임산, 출산, 육아에 대한 질문을 듣기는 하지만 ‘남자 친구 없고 결혼계획 없고 결혼이 싫고 난자를 얼릴 생각도 없다’는 준비된 모범답안으로 후속 질문은 원천 봉쇄한다. 의도야 어떻든 할당제를 시행해 파일럿의 남녀 비율을 5:5로 맞추려는 회사에 지원해 약간의 혜택을 받고 입사하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엔딩에서 갈등이 성급하게 봉합된다는 비판에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건 한정우가 여장남자 한정미가 아닌 여성 한정미로 겪은 차별에 진심으로 공감해서 사과하게 된 것인지 의문이 드는 탓이다. 이는 두 가지로 나뉜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 한정우는 노문영 이사(서재희)에게 정체를 들키지만, 한정미로 매출을 높이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던 노 이사에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1년 뒤 재취업 시켜주겠다는 협박과 회유를 당한다. 괴로워하는 한정우는 술에 취해 엄마에게 전화하고 ‘쪽 팔리게 살지는 말자’는 말을 듣는다.
얼마 후. 기자들이 모인 대표 취임식에서 한정우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윤슬기(이주명)에게 달려가는데 이 결정이 그간 쌓아온 개인 간의 친분 탓인지, 억울한 루머에 휩싸인 슬기를 구하기 위한 정의감 때문인지는 애매모호하다. 물론 두 감정 모두가 진실이기는 하겠지만 한정우가 전 직장에서 해고된 이유가 여직원들을 ‘꽃다발’이라고 부른 성차별 때문인데 그에 대한 진심 어린 뉘우침을 하는 변화 과정이 영화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탓이다.
도착 지점이 모호한 영화의 조종간을 잡고 안정적으로 착륙시키는 건 역시 조정석이다. 수년간 뮤지컬 <헤드윅>으로 다져진 드랙퀸 연기를 바탕으로 한 여장남자는 대체할 배우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극에 녹아든다. 윤슬기 역할의 이주명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내 편이 되어줄 건 확실하지만 친하다는 소문이 나기는 꺼려지는 강단 있는 직장인을 잘 소화했다. 한정미 역할로 나온 한선화는 등장 장면마다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로 웃음을 터트리며 빛나는 재능을 선보인다.
판타지 같은 이야기지만 오히려 현실적인 설정은 최근 개봉한 어떤 한국 영화보다도 독보적으로 탄탄하다. 각각 30년, 15년 만에 영화에 출연한 유재석 조세호의 <유퀴즈 온 더 블록>으로 시작하는 오프닝부터 ASMR 뷰티크리에이터를 꿈꾸는 동생 한정미. 이찬원의 팬클럽 ‘찬스’로 열심히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찬또할미이자 남매의 엄마인 김안자(오민애)까지. 훗날 미디어를 통해 2024년 한국 사회가 어떤지 보고 싶다면 <파일럿>에 담겨있다고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한국 사회를 담은 건 겉모습뿐 아니다. 한정우의 아내는 경단녀로 인정받는 파일럿이자 인플루언서로 바쁜 남편 대신 독박육아를 한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시어머니의 칠순 잔치 장소까지 알아보고 예약하지만 한정우는 그녀가 기름진 음식을 못 먹는 줄도 모르고 갈비찜을 해 먹자는 철없는 소리나 한다. 당연히 파일럿을 꿈꾸겠다고 생각한 아들이 사실 발레에 관심이 많았지만 관심이 없어 몰랐던 아빠의 모습까지도 2024년의 한국 사회 그대로다.
■ 여자에게는 늦고 남자에게는 빠르다
<파일럿>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건 영화 외적으로도 맞다. 영화평은 극단적으로 나뉜다. 특히 남성들의 평점이 전체적으로 좋지 않다. 상대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여성의 점수와 달리 실관람객(남 7.09/여 8.8)보다도 실제로 영화를 봤는지 모를 네티즌(남 5.78/여 8.74)에서 남성의 평가가 유독 낮은 점이 눈에 띈다. 후기에서 호평을 받는 부분은 최종 빌런인 여성할당제와 페미니즘을 도구로 쓰는 노 이사가 여성 CEO라는 부분 역시 남성들의 평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가장 큰 혹평의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항공사를 대표하는 파일럿이 문제의 ‘꽃다발’ 발언 때문에 해고당한 뒤 업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게 이해가 안 된다는 점이다. <파일럿>에서는 윤슬기의 입을 빌려 여성 승무원들의 외모를 평가하며 꽃다발이라고 하는 게 왜 칭찬이 아닌 성차별이 되는지 민망할 정도로,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사내 윤리교육 영상에서도 가장 먼저 나올 이 메시지는 여전히 영화 바깥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누가 봐도 남자 같은데 여장인 걸 눈치 못 챈다는 게 몰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손발이 크고 어깨가 떡 벌어졌기 때문에 여성처럼 보이지 않는다니. 더스틴 호프만은 <투씨>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스스로 멋진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장한 내 모습은 만약 파티에서 만났다면 말을 걸고 싶지 않을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여장한 내 모습이 데이트를 신청할 만큼 육체적으로 아름답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크게 울었죠. 그리고는 아내에게 '나는 이 영화를 꼭 하고 싶어. 내가 만난 여성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매력적이었는데도 나는 그들의 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어. 나도 외모 지상주의에 세뇌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라고 말했어요…. 코미디 영화 투씨는 나에게는 결코 코미디 영화가 아니었어요."
<파일럿> 후기 중에 ‘여자에게는 늦고 남자에게는 빠르다’는 평이 회자되고 있다. 1937년 할배 더스틴 호프만도 느낀 이 감정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합의되지 않았다는 놀라움이 <파일럿>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고스란히 담은 코미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공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