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ll, 2006
영화의 제목은 The Fall. 정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인 추락이 아니라 특별한 추락에 관한 이야기다. 추락은 주인공들과 관련이 있다. 5살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는 아버지의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는 영화 촬영 도중 낙마해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다. 추락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높이가 있어야 하며, 올라간 만큼 떨어졌을 때의 타격도 크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 두 사람의 추락이 특별한 까닭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떨어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알렉산드리아의 오렌지 농장도 그렇지만 로이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영화사는 막대한 보험금을 제시하지만 사랑하는 영화를 찍지 못하게 됐고 애인마저 이별을 통보한다. 로이에게 금전적 보상은 중요하지 않다. 흰색과 갈색으로 구성된 좋게 말해 안정적이고 차분한, 어쩌면 답답함에 더 가까운 병원의 풍경은 침대 밖을 떠날 수 없는 로이가 느끼는 무력감을 대변한 듯 보인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상상하는 이야기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로이와 달리 알렉산드리아는 지구 전체를 무대로 삼는다. 산호초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나비섬에서는 코끼리가 수영한다. 타지마할과 소피아 성당이 증명하는 완벽을 향한 인류의 도전, 히말라야산맥과 사막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이며 웅장한 자연풍광. 고대도시의 천문대가 주는 쇠락한 아름다움까지. 그 안에서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의 화려한 원색이 뽐내듯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런 차이는 화자인 로이와 청자인 알렉산드리아 사이에서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로이가 알렉산드리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이야기는 블랙 밴디트의 복수극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다. 로이는 인도 정벌에 나선 알렉산더가 사막을 지날 때 병사가 떠다 준 물을 ‘나만 마실 수 없다’며 쏟아버린 일을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드리아는 나눠 먹으면 되는데 왜 쏟아버리냐고 로이에게 되묻는다.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장면은 의도된 오해다. 5살인 알렉산드리아의 상상은 현실적이지 않다. 영화에서 표현되듯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하는 사람의 수가 열 명도 넘지 않는다. 인도 정벌을 위해 끌어모은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지만 투구에 있는 물을 나눠마실 정도의 사람이 알렉산드리아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끝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로이와 모자란 점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가치관 대립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완전한 소통이 아이러니하게 로이를 변화시킨다. 오디우스에 대한 블랙 밴디트와 무법자들의 복수담은 로이가 알렉산드리아를 이용해 모르핀을 얻고 과다복용으로 삶을 끝내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됐다. 하지만 로이의 말을 듣기만 하던 알렉산드리아가 점점 이야기에 참여하며 결국에는 엔딩까지 바꾸게 된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블랙 밴디트와 그의 복수를 돕기 위해 모인 동료들을 모두 비극적인 결말로 몰아넣고, 스스로도 삶을 포기하려던 로이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알렉산드리아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더 폴>의 초반부에 말의 그림자가 열쇠 구멍을 통해 알렉산드리아의 방에 거꾸로 비치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는 카메라의 원형인 카메라 옵스큐라와 원리이자,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에드워드 머이브리지가 촬영한 “달리는 말”에 대한 선명한 은유다. 과감한 은유는 영화에 대한 영화인 ‘메타 영화’로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작자가 본인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해 주는 관객에 의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적 희망의 자리에 <더 폴>을 위치시킨다.
관객이 슈퍼히어로처럼 특별한 능력으로 창작자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관객의 능력은 더 없이 소박하다. <더 폴>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로이를 믿는다. 걷지 못하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그가 외롭지 않게 찾아가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듣는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탓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야기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창작자의 모든 의도와 맥락을 전달할 수는 없다. 때로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더 폴>은 고통을 겪는 창작자를 구원하는 건 이야기에 집중하는 태도를 지닌 단 한 사람의 관객임을 초현실적 이미지들을 통과해 보여준다.
<더 폴>의 배경은 영화의 장르가 확립되기 전인 1920년대다. 감독은 빈 캔버스에 이야기를 그려가고 싶었다고 한다. 장르라는 보편적인 기준이 세워지기 전의 빈 캔버스에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만든 영화가 채워진다. 추락을 경험한 그들이 공유하는 고유한 이야기는 이전에 어떤 영화와도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미지들을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A Fall’ 이 아닌 ‘The Fall’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영화의 엔딩에서는 스턴트맨들의 활약을 담은 추락 장면들이 이어진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처럼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있지만 무명의 스턴트맨으로 남긴 이들도 많을 무수할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영혼을 담았다고 생각한 틀니를 알렉산드리아가 오렌지 껍질에 넣고 땅에 묻은 것처럼, 무성영화 시기를 수놓은 개개의 추락은 당대의 창작자들을 로이와 같은 고통과 좌절로 몰아넣었겠지만 후대에 수많은 창작자의 마음에 닿아 독창적인 영화를 만드는 씨앗이 됐을 것이다.
뭉클한 엔딩은 영화사적인 의미만을 남기진 않는다. 2006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공개된 <더 폴>은 비평적으로도 흥행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직 전설적인 평론가 로저 이버트만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내며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Not Like, Love)’는 감상을 남겼다. 누구도 영화를 찾지 않아 실망하던 타셈 신 감독은 전기음성장치를 통해 흘러나온 이버트의 건조한 감상(침샘암으로 아래턱을 제거함)이 무엇보다 좋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로저 이버트의 감상이 타셈 감독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모르겠지만, 20년 만에 재개봉한 한국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다시 <더 폴>과 타셈 감독을 찾았다. ‘태어나자마자 장애가 생긴 아이가 20년 만에 다시 두 발로 걷는 것 같다’는 타셈 감독의 소감은 아마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모든 관객에게로 향할 것이다. 리뷰를 쓰는 창작자로서 긴 문장의 마지막까지 따라와 준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도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