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ke Up Dead Man: A Knives Out Mystery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이 영화화 될 때의 단점은 명확하다. 특히 대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의 경우 더 두드러지는데, 장르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도 캐스팅만으로 용의자를 추려낼 수 있다는 점이다. 반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배우의 이름값이 높은 순서로 주요 배역이 돌아가는 탓이다.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는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하거나 일찌감치 속임수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단점을 보완한다. 해당 인물이 실제 범인인지는 클라이맥스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3편까지 방향성은 그렇다.
범인을 일찌감치 공개하는 설정은 연출적으로는 관객들의 호기심과 집중력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장치지만, 반대로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단점도 있다. 이런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해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너무 뛰어난 작가들이 많았던 탓이란 옹호가 가능하다. 추리물의 역사가 100년이 지나며 기발한 속임수들은 빛이 바랬고, 제약은 점점 심해진다. 시대극이 아닌 이상 밀실, 외딴 오두막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은밀한 창작의 여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관객들은 항상 CCTV, 스마트폰을 먼저 떠올리니까.
그래서 ‘어떻게’,‘누가’ 죽였는지보다 ‘왜’ 죽였는지가 점차 중요해진다. 범행동기는 고갈되지 않는다. 치정, 복수, 명예, 돈은 고전적인 이유지만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보편정서다.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맨>은 각자의 믿음이라는 감정이 범행동기가 된다. 주드와 블랑의 첫 만남에서 정의되듯 2025년의 교회는 노트르담이 아니라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에 더 가깝다. 중세 양식을 모방한 고딕풍 건물, 제의용 사제복, 장대한 예식 절차가 굳이 현대까지 존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꺼이 입장료를 내고 놀이동산에 가듯이, 때로는 테마파크 자체가 방문 목적이 된다.
교회를 찾는 인물들은 각자 믿음의 영역을 구축한다. 아내에 대한 믿음, 치유에 대한 믿음, 재기에 관한 믿음, 명예 회복에 대한 믿음, 교회에 관한 믿음 등. 이웃을 사랑하라던 예수의 가르침은 사라진 기복신앙의 집합이다. 사제인 윅스 신부(조시 브롤린)는 이러한 믿음, 아니 욕망을 부추기며 편 가르기에 나선다. 신입 교인을 힐난하며 기존 교인들에겐 얄팍한 도덕적 우위를 제공하고, 충성 경쟁을 연료 삼아 자신의 제국을 만들어간다. 모종의 사건으로 희생과 대속의 상징인 십자가가 없는 ‘불굴의 성모 성당’은 변질되고 앙상한 이들의 신앙을 꾸밈없이 드러낸다.
윅스와 척지는 주드 신부(조쉬 오코너)라고 이들과 다르지 않다. 주드 신부는 사제의 길에 접어들기 전에 길거리 복서였다. 시합 도중 상대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챘지만, 실수로 혹은 감정이 앞서 계속 주먹을 날리다가 상대방을 죽게 만든 전적이 있다. 그의 행동 근저에는 그때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은 욕망이 깔려있다. 사이비에 가까운 윅스의 사망이 통쾌했다는 고백에서는 교회의 정상화를 빌미로 그 역시 자신의 제국을 꾸려가려는 욕망이 슬쩍 내비친다.
허울은 좋았던 믿음의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은 이쯤 되면 필연적이다. 윅스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이브의 눈물’이라는 막대한 유산의 행방을 알아챈다. 자신도 신을 믿지 않으며 거짓 선지자 행세에 질려있던 윅스는 모두의 치부를 폭로한 뒤 교회를 닫아버린 생각이었다. 믿음이 살해의 동기가 된다면 브누아 블랑(대니얼 크레이그)의 역할 축소 또한 자연스러운 행보다. 무신론자임을 천명한 그는 메시아가 될 수 없고, 그럴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주드 신부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 범인찾기를 관두고 순순히 누명을 받아들여 대속을 결심한다. 과연 범인의 정체는 어떻게 밝혀질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명동성당에 붙은 공지가 화제다. 성탄절을 앞두고 진행되는 ‘판공성사’에서 죄지은 이유를 설명하지 말고 지은 죄만 간략히 고백하라는 내용이다. 판공성사 시기에 사람이 몰리니 짧게 끝내려는 운영적 편의도 있겠지만, 이유를 설명하면 누군가를 험담하게 되고 이는 고해하러 와서 죄를 짓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친절한 엄숙한 설명에 ‘아니 그게 아니고~’로 시작하는 한 해의 묵은 사연들을 억누를 자제력이 조금은 피어난다.
명탐정 블랑은 속임수를 알아채지만 “이 사건은 내가 풀 수 없다”라고 말한다. 블랑은 사건을 해결하러 온 메시아가 아니라, 함께 해결해 나가기 위한 조력자의 위치에 서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이가 스스로 믿음의 길. 즉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단상에서 내려온다. 추리물의 장르적 재미가 다소 희생되더라도, 1편부터 쌓아온 캐릭터성은 더욱 강력해진다. 매편 성공할 수는 없지만 매번 더 브누아 블랑에게 정을 붙여가는 측면에서는 탁월한 결정.
고발이 아니라 고백이 필요한 세밑이다.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맨>과 함께라면 명동성당 공지의 마지막 문장이 바라는 삶의 태도를 조금은 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찰은 길게, 고해는 짧게.